leopord의 무한회귀 2009 ver.0.02 공지사항

Coldplay :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 (4th album)
공지 및 방명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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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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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정치비판 :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메멘토 리스트 : 이슈 혹은 끓어오르다 사그라드는 그 무엇. 망각에 저항하는 소박한 시도.
영화를 말한다 : 영화에 대한 그닥 사랑스럽진 않지만 따뜻한 언어가 되길 바라며.
노래를 부른다 : 노래란 부르는 것. 드러내는 것. 그래서 방자하고 오만하지만 또 애틋한 것. 그들을 부르는 이야기.

5. 본 공지사항은 주인장의 필요에 따라 업데이트 및 변경됩니다. 그럼 2009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__)

6. ver.0.02 업데이트 : 2009년 4월 10일 금요일
ver.0.02 변경 :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습작소설공개> 카테고리 삭제)


<파주> : 가장 두려운 것, 익숙함 영화를 말한다

* 스포일러 있음.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 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관계의 시찰원들인 듯 했다. ..."무진엔 명산물이……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김승옥, <무진기행>)

영화 <파주>(2009)를 설명할 때 으레 따라오는 것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다. 가상의 공간 무진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파주 또한 안개의 도시다. 속에 품고 있는 것을 감춤으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안개는 모호함의 상징이다. 은모(서우)의 3년만의 귀환. 파주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소설 <무진기행>을 변주한다. 카메라는 파주 진입을 알리는 고속도로 표지판을 비추고, 은모가 탄 택시 뒷좌석엔 시찰원 대신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타고 있다. 은모는 재개발, 더 나아가 물리적인 권력의 상징인 나이트클럽을 표정 없는 얼굴로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중식(이선균)에겐 과거가 있다. 수배 중인 운동권이었고, 선배의 아내를 사랑했으며, 비록 사고였지만 연인의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자책한다. 선배가 사는 파주를 찾은 그는, 선배가 목회활동을 하는 교회에서 봉고차를 몰고 공부방 선생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한 여자(심이영)를 만나고 결혼한다. 여자는 곧 사고로 죽고, 중식은 여자의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오랜 애증 관계의 시작이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파주>는 그렇게 모호하지 않은 영화다. 파주의 철거현장을 배경으로 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은모와, 진실을 에둘러 감추려 하는 중식 사이의 갈등이 영화를 끌고 간다. 돌멩이와 벽돌로는 폐건물을 사정없이 때려부수는 포크레인을 당할 수 없어 화염병을 던지고 용역 깡패들에게 욕을 퍼붓는, 격렬한 철거현장은 용산의 절규인 "여기 사람이 있다!"를 고스란히 반복한다.

영화에서 모호한 말투와 태도로 '안개'라는 이미지와 극도로 부합하는 은모는 <파주>의 긴장과 파국을 이끄는 동력이지만, 무엇보다 눈이 가는 캐릭터는 중식이다. 그는 카메라의 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그는 공부방 아이들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꺼낸다"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의 짖궃은 장난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도망쳐 버린다. 술을 억지로 들이켜서야 아내와 섹스를 하는 중식이 이를 악물듯 내뱉은 "용서해주세요"는 섹스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의 본심에 닿지 못함을 드러낸다. 침묵의 절정은 가스폭발사고의 진실을 감옥에 갇혀서라도 은모에게 절대로 알리려 하지 않는 씬에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원망하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인도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난 은모를 받아들인 중식으로선 자연스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물대포를 피해서 서 있는 철거대책위원장 김중식(형부)에게 최은모(처제)가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고 질문할 때였다. 그 물음에 김중식은 씁쓸한, 말하자면 생애전환기의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엔 멋져보여서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는 갚을 게 많아서였고, 지금은 그냥 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네.” 이처럼 무서운 대사가 어디있는가? 멋져 보여서 시작할 때 그는 선배 부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고, 갚을 게 많아서 그 일을 계속할 때 그는 아내가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고, 그냥 할 일이 자꾸 생길 때는 처제에게 “한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연수, <이거야말로 인간의 종말이로구나>, 씨네21 제728호)

소설가 김연수가 이 장면을 가장 무섭다고 한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종말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의 종말이란 선의든 악의든 결국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감옥에 갇힌 중식이 선배 목사와 대화하는 씬을 들겠다. "조금 겪어봤는데, 은모는 그냥 모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철거위는 어쩔건데?"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는 선배의 물음에 중식은 망설인다. "그냥... 제가 너무 교만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인생의 종말 만큼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익숙함이다. 중식은 상처를 주고 받는 일에, 나아가 감옥에 갇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거다.

철거현장에서 "내가 혼자 감옥 가는 걸로 책임질테니 화염병을 던지자"고 말할 때도, 3년 전 유치장 안에서 은모에게 "이상해?"라고 말하며 웃을 때도, 은모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도(그 사랑은 상당한 죄책감과 연민을 수반하는 듯 하지만), 그리고 끝내 진실을 감추겠다고 결심할 때도 무수한 오해와 편견을 감수하게끔 하는 힘은 바로 익숙함에 있다. 자기를 도구화하는 인간의 슬픈 전형으로서, 중식이 스스로 교만했다는 지적은 옳았다. 그는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결국 또 다시 모든 걸 책임지려든다. 중식에겐 그런 삶의 방식에 충분히 닳고 닳았다.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은모가, 비록 철거현장에선 끝내 '괴물'이 되어버렸지만, 중식을 떠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은모를 떠나보내고 진실을 묻어버리려는 중식의 태도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파주의 짙은 안개조차 모든 진실을 감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결별이 새삼 다행스럽다.



통계는 반박하지 않는다. 그저 해석될 뿐이다. 현실정치비판

'88만원 세대' 론의 실증적 허구성: 세대착취는 실재하는가
(socio 님 포스팅)

1. (존칭생략) socio가 인용한 중앙대 신광영 교수의 <세대, 계급과 불평등>(「경제와 사회」2009년 봄호(제81호))은 우석훈의 88만원세대론에 대한 반박이다. 실증분석을 토대로 이론적인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socio의 말대로 그것이 반드시 세대 간 갈등의 위험성을 기각했다고, 88만원세대론을 논파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통계는 그 자체로 어떤 주장을 반박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해석될 뿐이다.

2. 우선 신 교수의 연구방법론인 타일지수Theil Index의 사용에는 이견이 없다(지니계수Gini Coefficient가 아니라 타일지수를 사용한데는 용이성 외의 다른 요인이 있을 듯 하다.). 다만 자료에서 당연시되는 전제인 '연령대 상승에 따른 소득증가'와 구조조정 및 종신고용제 사이의 상관성에 대한 의문이 든다. 즉, 자료가 IMF 구제금융기인 1998년에서 비교적 최근 기간인 2007년까지의 9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에 기업의 구조조정 강화와 종신고용제 약화가 고용불안정-소득불안정이라는 현상과 직결되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이 자료에서 구조조정과 종신고용제가 연령대 상승에 따른 소득증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종신고용제와 연령대 상승에 따른 소득증가는 충분조건은 성립해도 필요조건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추측은 가능할 것 같다.).

3. 또, 두 노동패널 자료만으로는 2003년 ~ 2007년 사이의 국제금융시장의 팽창과 국내자본시장의 상대적 자유에 따른 경기호황(신자유주의의 최전성기라고 인식되었던 시기이자 펀드시장이 과잉팽창했던 시기)이 '부의 양극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확인할 수 없을 것 같다(어느 비판자가 비슷한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자산소득이 부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덧붙여 노동패널 자료는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을 통해 도출한 것으로 추측된다.).

4. 1998년 연령 코흐트별 계급 분포와 2007년 연령 코흐트별 계급 분포를 보면 두 표는 9년 사이의 국민소득 감소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socio는 20대의 취업률과 중간계급·노동계급 정규직 진입률 사이의 차이에 대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20대의 문제는 사교육을 통한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대학에 입학하였고, 취업 준비로 4년 이상을 보냈는데, 정작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난을 겪으면서 생기는 소모적인 교육제도와 청년 실업자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경제위기 이후 20대만의 독특한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는데(정정 : socio의 견해가 아니라 신광영 교수의 해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2007년 자료 중 중간계급 정규직 진입률(30.0%)은 그렇다 쳐도, 높은 노동계급 정규직 진입률(44.2%)에 대해서는 좀 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상대적으로 고학력인 지금 20대의 대학진학률을 확인하고, 20대의 노동계급 정규직 진입 과정에 대한 정성적·정량적 자료가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5. 신광영 교수의 연구는 88만원세대론에 대한 비판에 닿아있지만, 동시에 자료에서 두드러지는 건 60대 이상 고령 인구의 비정규직화 심화현상(1998년 노동계급 비정규직 14.6% -> 2007년 20.5%)이다. 세대 간 갈등보다 계급 간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계급 간 갈등에만 주목해서는 두 노동패널 자료 사이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상 60대 이상 고령 인구의 비정규직화-이는 인구 고령화와도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88만원세대론과 상충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사회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 같이 묶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물론 2007년 이후 88만원세대론의 빠른 확산으로 인해 고령화 및 고령 인구의 비정규직화 문제가 다소 소외된 감이 있다.).

6. 요컨대 자료가 우석훈의 '88만원세대' 개념을 완전히 논박한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socio 스스로 밝혔듯이 성별 변수를 통제했을 경우 세대착취 가설의 부분적 타당성이 검증될 수 있다고 했는데, 88만원세대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상 중 20대 여성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한겨레21, <골라서 잘린다, 30대 여성 비정규직>(제754호), <출발부터 빚더미, '마이너스족'의 늪>(제737호)은 직·간접적으로 20대 여성의 실업과 비정규직화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세대와 성별 외의 변수, 즉, 지역, 학력, 장애여부 등을 고려한다면 88만원세대론을 "문화사 차원의 속류적 해석과 허울 좋은 정치신학"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흥미롭게도 20대-여성-지방-고졸(및 그 이하)까지 고려한다면 이에 가장 근접한 직종이자 시대적 아이콘은 '시다'와 '공순이'다.).

7. 더 나아가 우석훈의 '의도'까지 파헤치려는 악의 섞인 몇몇 덧글은 우석훈의 '88만원세대' 개념은 물론, 신광영 교수의 비판적 연구와도 관련이 없다. 연세대의 생태주의 선본을 '우석훈 선본'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자유지만, <88만원세대>가 20대 중산층(이른바 '강남 좌파')에게 어필했다는 현상을 바탕으로 우석훈의 의도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 88만원세대론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근거인 "정작 책을 읽어야 할 20대 비정규직들은 그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에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은 <88만원세대>'만' 안 읽는 것이 아니라, <88만원세대>'도' 안 읽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주장의 동의 여부를 떠나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노동 및 생활) 조건을 먼저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8. <88만원세대>는 출간될 때부터 논란을 염두에 두었다고 본다. 책의 성공과 개념의 확산에는 으레 비판과 비난이 따르기 마련이고, 개념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반감도 커지기 마련이니 작용-반작용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감수해야 할 일이다. 거꾸로 88만원세대론이 아니었으면 20대 비정규직화-빈곤화 문제가 이만큼 공론화가 되었을지 또한 의문스럽다. '88만원세대' 개념이 빛을 발했던 이유는 바로 한국사회가 '다음 세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묻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 동안 좌파도 우파도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제시하지 못할 때, 거칠고 다소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다음 세대의 생존과 세대 간 공존을 위한 신호를 보내는 작업이 '88만원세대' 개념 아니었을까. 그 점에서 신광영 교수의 연구도 끝내 '88만원세대' 개념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88만원세대' 개념이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프레임으로 제시된 지 2년. 어떤 개념이 진실이냐 아니냐라는 이분법보다, 개념의 극복이 현실의 극복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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