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pord의 무한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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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2일 개장해서 2010년 11월 14일까지 운영했군요. 제대로 쓰기로는 2008년 여름부터니 만으로 2년 정도 지났습니다.

그 동안 재밌는 글도 많이 읽었고, 좋은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가능한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나누며 서로 배우고 싶었습니다.

더러는 공론장에서 논쟁도 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썼지만, 때론 그 과정에서 감정이 상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과합니다.

이제 이글루 블로그는 일종의 작은 아카이브로 남겨둡니다. 가끔 서평이나 자료를 찾으러 오는 분들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너 오스트롬의 작년 사이언스 기고문 번역은 엘리너 오스트롬 기고문 카테고리에 넣어놓았습니다. 발번역이기 때문에 원문과 대조하며 보실 것을 권합니다. 

저는 새 블로그에서 계속 온라인 생활을 보내려고 합니다. 책 읽고 생각난 것을 쓰면서 조금씩 앎을 쌓아가고 싶네요.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그람시 팜플렛 서평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안토니오 그람시, 김종법 옮김 / 책세상, 2004)는 그람시가 투옥되기 전까지 『오르디네 누오보』(새 질서) 등에 기고한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어서 말할 『대중 문학론』이 그람시의 『옥중수고』(원래 『옥중수고』는 모두 32권 2828쪽의 방대한 분량이라고 한다. 국내 번역본은 그 중에서 정치와 관련된 수고와 철학·역사·문화 등과 관련된 수고만을 뽑아놓은 것이다)에서 추려낸 것과는 좀 다르다. 책세상문고의 콘셉트인 '문고판'이 사회주의 정치인 그람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두 책 모두 '그람시 팜플렛'이라고 불리워져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줄여서 『남부 문제』라고 하자)에는 젊고 팔팔한 청년 맑스-레닌주의자로서 그람시가 드러난다. 『옥중수고』에 비해 깊이는 얕고, 표현도 훨씬 직설적이다. 대신 시원한 맛은 있다. 『옥중수고』가 파시스트 체제의 감시와 검열, 촉박한 시간과 부족한 자료, 더욱 심각해져가는 질병 속에서 쓰여지면서 개념 사이의 혼동이 잦고, 용어도 불분명하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사회주의와 관련된 말을 거의 쓸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우회적인 표현을 써야 했다. 오히려 이 점이 그람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는 게 역설적이다).

그람시는 『남부 문제』에서 노동 계급과 농민 계층 사이의 동맹을 역설했다. 여기서 '남부'는 로마 이남의 캄파냐(나폴리), 풀리아, 칼라브리아 등 '장화'의 아래쪽만 지칭하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물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같은 섬도 포함한다. 하지만 '남부'의 의미는 '봉건제가 남아 있는 후진적인 농촌 지역'을 지칭할 때 보다 선명해진다. 이건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와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다. 피에몬테·사르데냐의 사보이 왕국이 통일 이탈리아를 건설했지만,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피에몬테는 북부 산업 지역을 상징하는 국가였고, 이탈리아 통일 과정은 사보이 왕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통일 이탈리아는 사보이 왕국의 형태를 확대한 수준이었기에(왕실 친위대인 '카라비니에레'가 지금도 헌병 경찰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남부 농업 지역이 북부 산업 지역에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사르데냐 섬의 분리 독립 운동이 겹치면서 통일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남부 문제는 이주 노동 문제와 겹쳐 이탈리아 안에서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그람시는 노동 계급이 농민 계층과 연대하고 그들을 지도하지 못한다면, 농민 계층은 반동적인 지주 계급과 산업 자본가의 편이 되어 노동 운동을 탄압하고 분쇄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런 노동자-농민 사이의 갈등은 유럽 곳곳에서 표출되곤 했다. 단적으로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는 지주 계급과 극우파가 연합해 '붉은 빈'(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정부)을 위협했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이 두 개의 개입주의 시대에 대단히 큰 차이점이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1795년의 영국 농촌이 보호받고자 했던 위협은 도시 공업 생산의 엄청난 발전이라는 경제적 진보로 인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이었던 반면, 1918년 빈의 산업 노동계급을 위협했던 것은 전쟁과 패전 또 그로 인한 산업의 대혼란과 같은 경제적 퇴보가 낳은 여러 결과들이었다. (…)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향토 방위단(Heimwehr)의 승리는 전 국민적·사회적 체제가 완전히 파탄나는 사태의 일부였을 뿐이다." 『거대한 전환』, p.275).

글이 씌여질수록 '남부'는 그람시에게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남부의 농민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인식하고 지배의 대상으로만 다루던 보수적 관념과 통치 방식에 반대한다. 대신 그람시는 발상을 전환한다. 어떻게 해야 노동 계급이 남부의 지적·도덕적 지도를 획득할 것인가. 여기서 '헤게모니' 개념의 씨앗이 싹트는 듯하다. 또, 이탈리아의 복잡다단한 정세에서 도출된 '남부 문제'는 하위 계급subaltern classes과 함께 탈식민주의 연구의 주된 개념으로 이어진다.

옮긴이 김종법은 그람시의 '남부 문제'를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면 영·호남 문제로 치환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영·호남 문제가 아니라 남북 문제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 물론 이탈리아의 남북 간 지역감정 문제를 상상할 때 영·호남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단선적인 해석 아닐까. 오히려 굽시니스트 만화에서 보여지듯 통일 후 북한이 일종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시사인 제160호 "극동의 김씨 조선"). 일전에 거칠게 북한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 역시 북한 인민을 은연중에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은가(leopord, <북한 시민>). 그리고 그람시의 노농 동맹을 현재 민주노총과 전농의 연대로 단순히 치환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듯싶다. 


한편, 『대중 문학론』(안토니오 그람시, 박상진 옮김 / 책세상, 2003)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람시가 감옥에 있을 때 쓴 수고 중 대중문학과 관계된 부분을 뽑아놓은 책이다. 일전에 초록불 님 역시 이 책을 포스팅했는데, 주로 지금 한국의 장르문학(및 문학 일반)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람시의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다(초록불, <안토니오 그람시의 <대중문학론>>).

이탈리아 대중이 즐길만한 이탈리아 대중 소설이 없다는 비판은 언뜻 문학비평가의 푸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람시가 처한 상황은 그런 푸념조차 사치였던 것 같다. 오히려 정치범으로서 지독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중에도 끈질기게 지적 편력을 지속하는 의지가 놀랍다("감옥에서 그람시는 삶에 대한 의욕과 애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그가 공부에 기울인 열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한때는 매일 다섯 종류의 신문을 읽었고 일주일에 여덟 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받았으며, 그 외에 잡지와 밀라노에서 발행되는 금융 경제 신문인 《일 솔레Il Sole》를 구독했다." 해제, p.135).

그람시가 이탈리아 작가를 통렬하게 비판한 배경에는 역시 리소르지멘토가 있었다. 통일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른바 '지식인'이 대중과 유리된 채 지배 계급에 편향된 작품만을 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여기서 '대중'이라는 용어 역시 검열을 염두에 두고 쓰인 말인 듯싶다. 노동 계급과 농민 계층(좀 더 나가면 중간계급까지)이 보다 적합한 범위인 것 같다. 요컨대 지식인이 대중과 어우러져 대중의 희망을 반영하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유기적 지식인'과 '헤게모니' 개념이 겹쳐진다.

그런데 종종 왜 그리도 문학을(혹은 문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느냐는 반발이 있어 왔다. 하지만 정치적이지 않은 문학은, 특히 근대 문학(문화) 중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었다.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 톨스토이와 도스또옙스끼, 뒤마와 스탕달, 셰익스피어 모두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고 더러는 선도하며 더러는 반동적이었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그람시의 말을 인용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기독교적 이념의 관점에서 출발해 셰익스피어를 분쇄하고자 한다. 그의 비평은 예술이 아니라 도덕과 종교에 관련된 것이다. 크로즈비의 글은 수많은 저명한 영국인들의 견해와 반대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에는 대중과 노동자들에 대한 거의 어떠한 동정의 말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셰익스피어는 자기 시대의 경향에 순응하면서 드러내놓고 사회 상층 계급의 편에 섰다. 그의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다. (…) 버나드 쇼의 편지는 '예술가'로서의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셰익스피어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버나드 쇼에 따르면 문학에서는 자기 시대의 도덕을 초월하고 미래의 새로운 요구를 직감한 작가들에게 제일 중요한 자리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자기 시대에 '도덕적으로' 우수하지 않았다. 이러한 주장들에서 톨스토이 식의 도덕주의적인 경향과 버나드 쇼처럼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해 나중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경향을 모두 걸러내야 할 것이다. (p.124)

소소하게는 추리 소설과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감옥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책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손에 집히는 대로' 읽다 보니 대중 소설을 접하면서 생각을 발전시킨 것 같다. 『셜록 홈즈』의 코난 도일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체스터튼이나 에드가 앨런 포가 더 낫다는 평, 쥘 베른의 SF에 대한 코멘트 등이 꽤 재밌다. 니체의 '초인' 개념이 연재 소설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마찬가지("어쨌든 수많은 자칭 니체적 '초인'이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정통한 기원과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p.101).

그람시의 문학 비평은 그의 『옥중수고』 속에 녹아들어 이후 문화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중 문학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조망해 보기 전에 그람시 문화연구를 맛보기에 좋은 책이다. 

* 192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공세를 막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조직된 보수 무장 단체. '고향을 지키는 탄환 공세'라는 뜻을 가진 이 단체는 농촌 지역 등의 보수적 지주 계급들이 보수적 민족주의 등에 기초하여 스스로 무장력을 가진 단체들 중 가장 큰 것이었다. 1934년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당이 불법화되는 파시스트 정권 탈취가 벌어질 때에 큰 역할을 했다. (『거대한 전환』 옮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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