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폴라니 : 서평에서 못다한 이야기 현실정치비판

0. 앞서 이야기한 칼 폴라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2002) 서평에서 못다한 것들에 대해.

1. 지난 서평에서 묘사된 폴라니는 자칫하면 조합주의자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노동조합-생활협동조합-공정무역-사회적 기업-지방자치단체-진보정당을 엮는 풀뿌리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대안'은 <한겨레21>에서 일부 제시했지만, 사실 그건 폴라니가 중점적으로 제시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겨레21>의 설레발에 발이 묶인 셈이 되었는데 그 정도 착오야 감내하겠다.

2.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소책자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에서 제시한 노동조합-산업결사체-소비자협동조합(생협)-사회주의적 자치단체-사회주의 정당의 연계란, 1920년대 당시 유럽 각국에 널리 퍼져있던 노동세력 조직을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전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전략은 당대의 현실과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역 풀뿌리 공동체 전략은 낡은 것이니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폴라니는 조망이라는 개념-독일 관념론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을 통해 사람의 살림살이가 시장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인간의 욕구와 노동의 노고, 정신적인 보상을 챙겨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앙집권적) 관치 계획경제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부가 통계와 조직을 무기로 경제를 계획해 나갈 때, 시장경제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치 계획경제 또한 마찬가지 잘못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각각의 노동주체가 자신의 삶의 영역(노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표현하고 자신과 자기 조직을 조망해야만 민주적인 내적감시가 활발해져 민주적인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아이디어는 기존의 조직을 재해석하고 재활용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그의 주장은 소책자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오토 바우어가 주장한 기능적 민주주의의 연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현재의 금융위기 국면에, 중앙집권적 토건국가 대한민국에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응용과 변형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노동조합(민주노총 등)과 생산자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이 있고 공정무역의 무역량은 증가하고 있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이들 간의 연계는 더더욱 먼 길이다. 인터넷과 빠르고 폭넓은 정보유통이 있으니 그나마 1920년대 유럽보다 나은 조건이라고 하겠다.

3. 폴라니의 강점은 <거대한 변형>을 비롯한 경제인류학적 연구에 있다. 인간이 상품으로 거래됨으로써 발생하는 소외에 맞서기 위해 시장과 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명하는 시도는,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기 이전에 시장 신화를 먼저 공격하고 깨뜨림으로써 대안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는 노력과 병행할 때 의미가 있다. 한편 이택광 님은 "최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칼 폴라니를 거론하는 이들도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폴라니의 정체성을 '경제학자'라는 포장으로 덮기에 바쁠 뿐, 그 비슷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온 인문학의 목소리에 그닥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고 비판했다(<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폴라니를 읽어냄에 있어서 경제학과 인류학(이를 인문학 일반으로 넓혀도 좋은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을 따로 구분하기란 사실 어렵다.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은 경제학자보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가 받아들이기 쉬운 부분이 더 많다는 것도 생각해 봐야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무역과 근대 국제무역을 비교했을 때 상(商)에 대한 관점과 사회적 기반이 다르다는 고찰은 역사학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아이디어를 주신 한단인 님 ㄳ). 폴라니가 너무 경제학자라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현상과, 학자들의 '설레발'에 대한 짙은 피로감은 이해가 되지만 말이다.

4. 당대(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여느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폴라니 역시 점점 심화되고 강화되는 자유시장경제와 대중정치 사이의 충돌을 걱정하고 있었다. 폴라니는 근대 이전까지의 사회와 시장 사이의 관계가 근대에 들어서 역전됨에 따라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발생하고, 사회의 자기보호운동과 시장의 자기조정능력이 충돌함으로써 19세기 세계가 이중적 운동으로 굴러왔다고 분석한다. 문제는 이중적 운동이 헤겔적인 변증법(정-반-합)의 발전 구도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가 걱정한 건 두 세력의 충돌 자체가 아니라, 두 세력 간의 교착상태였다. 폴라니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에 반드시 진보세력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토지귀족의 부르주아 계급 견제와 같이), 극도의 비인간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장 자본주의는 결국 파시즘으로 흘러갈 것을 두려워했다. 자기실현적 우려였을까. 파시즘은 현실화되었고 그가 활동하던 오스트리아도 파시즘에 침식당해버렸다.

5. 폴라니의 궁극적인 고민이 사람다운 삶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특히 청년 맑스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파헤친, 상품생산과정에서 인간이 노동으로 바뀌면서 소외되어간다는 지적에 동의하고, 물질적인 만족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만족까지 충족되어야 참다운 삶이라고 보았다. 폴라니는 (비록 아버지의 뜻이긴 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종교적 영성이 인간의 삶에 주는 힘을 소중히 여겼다. 맑스주의에 대한 소고와 강의록을 모아놓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 마지막에는 폴라니의 맑스 비판이 눈에 띈다. 맑스는 종교의 힘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종교 자체를 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또, 맑스의 정치·종교 비판이 미국과 캐나다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미국이 건국 때부터 의회정치를 시작했듯이-을 통해, 폴라니는 맑스는 천상 유럽인이었다고 지적한다(비슷한 지적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도 나타난다.).

6. 성장에 집착하지 말고, 소비에 너무 빠져들지 않기. 폴라니의 시장경제 비판을 실천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부분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표류기>에서, 또 블로그에서 허지웅이 여러 번 강조하는,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대안'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한편, 한윤형은 <이택광과 칼 폴라니 논쟁, 그리고 독해의 문제>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체제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대중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데에 그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이고, 또 폴라니 역시 그런 지식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안이란 비판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니만큼 그걸 대중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도 어딘가 궁색해 보인다. 유일한 대안도, 진정한 대안도 없다. 그러나 대안의 새싹은 비판이라는 밑거름이 있어야 싹틀 수 있다. 시장이 사회를 잡아먹고, 금융이 실물을 잡아먹고, 기득권층이 서민을 잡아먹는 시대. 폴라니는 더 나은 싹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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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opord의 무한회귀 : 090808 2009-08-08 17:12:57 #

    ... : 부족한 일련의 글들, &lt;시장을 사회에 착근시켜라 : 시장주의에 대한 오히려 급진적인 대안&gt;, &lt;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gt;, &lt;서평에서 못다한 이야기&gt;들은 폴라니에 대한 이야기였고, 폴라니를 인용하는 '경제학자들'을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한 이택광 님의 글 또한 같이 엮일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에도 이 ... more

  • 다름과 틀림사이 :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안내 2009-10-21 18:01:48 #

    ... <a title="칼 폴라니 : 서평에서 못다한 이야기" href="http://leopord.egloos.com/4115961" name="4115961">칼 폴라니 : 서평에서 못다한 이야기</a><a title="칼 폴라니 : 서평에서 못다한 이야기" href="http://leopord.egloos.com/4115961" name="4115961"> </a> ... more

덧글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4/15 21:11 # 답글

    2. 폴라니가 이야기한 지역 풀뿌리 공동체의 이상과 제일 비슷했던 것이 '프라하의 봄' 시절의 체코슬로바키아가 아닐까 합니다. 르 디플로 4월호에 밀란 쿤데라 기사가 있었는데, 프라하의 봄에 대한 쿤데라의 회상이 참 아리더군요.

    "그 짧은 순간에 원래 당의 의지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려고 조직된 모든 사회단체가 예기치 못한 민주주의의 도구들이 됐다. 거기서 우리는 확실히 사회주의적 기질(집단 경제, '협동조합이 꾸려가는 농업', 지나치게 부자인 사람도 지나치게 가난한 사람도 없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이 '비밀경찰의 해체' , '정치적인 박해의 종식', '검열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공존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쿤데라는 이것이 지속되지 않았고, 지속될 수도 없었다고 썼다. 하지만 "바로 그 '프라하의 봄' 시절에는 모든 것이 공존하는 시스템이 존재했으며, 그 시절은 정말 대단했다"고 피력한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4월호, 기 스카르페타, '밀란 쿤데라의 봄 그리고 프라하의 봄....'에서
  • leopord 2009/04/15 22:14 #

    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이런 기사가. '프라하의 봄' 하니까 직관적으로 광주를 떠올리게 되네요. 80년 5월 광주를 '해방구'라고 지칭했던 경향은 '꼬뮌'에 대한 환상과 엄혹한 정치상황이 겹친 탓인 것 같지만 말입니다.

    브레즈네프의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프라하는 얼마나 혁명의 역동이 넘치는 공간이었을까요(혁명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던 권력이 혁명으로 전복되는 역설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고통의 기억이었을텐데... 하지만 민주적인 사회주의가 자율적으로 동시에 폭발하는 현장을 경험한 사람에겐 평생 잊혀지지 않겠지요.

    풀뿌리 민주주의 공동체의 씨앗은 분명 곳곳에 있어요. 그런데 이 녀석들을 키우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니;;;
  • 한단인 2009/04/15 23:08 # 답글

    저는 자원 교환방식이 반드시 시장일 필요는 없었던 옛적 일이 떠올라 그것만 언급했을 분인데 [상(商)에 대한 관점과 사회적 기반이 다르다]는 것까지 확장해서 언급해주시니 개떡같은 댓글을 쑥떡같이 해몽을 잘해주신 격입니다. 저야말로 두루뭉술한 것이 보다 명확해져서 감사를 드려야할 입장입니다.
  • leopord 2009/04/15 23:38 #

    한단인 님 말씀을 듣자마자 박노자 씨가 생각나기도 했고 말입니다.ㅎㅎ; 한국사만 보더라도 조선시대를 중세와 근대 사이의 '근세'로 설정해 두고 조선 후기의 선대제 수공업을 자생산업의 맹아로 보는 관점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고요. 경제결정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른바 '자생적 근대론'에 대해서도 좀 더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자유로픈 2009/04/15 23:58 #

    이영훈은 조선시대 후기를 '소농사회론'이라는 이론틀로 분석하면서 산업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견해를 피력하지요. 주류 역사학계가 자본주의 맹아론-식민지수탈론을 정립한데 대해 소농사회론-식민지근대화론으로 대항논리를 구성하려 하고 있는 것인데......

    아직은 예단에 불과하지만, 전근대 시장과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데 폴라니의 관점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레오포드님의 설명만 일단 보고는 말입니다...) 암튼 공부를 해보아야겠군요.
  • leopord 2009/04/16 00:16 #

    자유로픈 님// 이영훈식의 접근은 결국 근대가 외부세력에 의해 이식될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결과론적 외삽으로 볼 수 있겠군요. 폴라니식 접근을 하더라도 주류 학계의 도그마를 깨보려다 되려 이영훈식 분석의 근거로 활용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까요.ㅎㅎ;

    아마도 폴라니가 좋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 감히 생각합니다만... 좋은 결과물 기대하겠습니다. :D
  • 2009/04/16 00:0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leopord 2009/04/16 00:12 #

    ㅋㅋㅋㅋ 북덕후라 햄볶아요??ㅋㅋ RSS구독은 아니고 일단 즐겨찾기 추가했다.ㅎ
  • 여울바람 2009/04/16 01:45 # 삭제 답글

    이택광 씨의 저 구절은 조금 '의아'했습니다. 폴라니의 정체성은 '경제학자'라는 데에 의의가 있는게 아니라, 그가 말하는 '시장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러한 것들의 '인류학'적 통찰에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칼 폴라니'를 보자는 것은 '그의 경제학적 예언'이 아님이 자명한데도, 오히려 '경제학'으로 표피를 씌우는 글처럼 보였거든요. 직접 이야기를 듣기보단, 미디어를 통한 필터에 접속으로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런데 이건 사족인데, '경제 인류학 콜로키움'에서 폴라니 강의를 맡았던, 연대의 박찬웅 교수는 한겨레21에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지요. 시민사회, 생협 등과 같은 제 3의 경제세력이 일정한 영향이 있고,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미 전세계적 시장이 나온 세계화된 현실에서는 전세계적 시장을 통제할 '사회'가 필요하고, 그러한 '세계적 사회 통제 장치'는 결국 국가로부터 나올 수 있을거라는(세계국가랄까요)논지를 전개했었죠. 뭐, 그래서 조한과 우석훈 씨를 비롯한 첨예한 논쟁에 휩싸였.......ㄱ-;

    사족 2번째로는, 위에 논의에서 연결지어보면, 사실 '특별한' 논의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이 워낙 유니크한 곳이기는 합니다만, 경제학을 배울 때,(특히 맑스 경제학..의 개론 같은 수업?ㅋ)항상 우리가 시장을 전제로 하는 것(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 그리고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배웠거든요. 물론, 폴라니의 논의가 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튼 핵심적인 논쟁 지점은 그닥 새로울 것은 없었죠. 다만, 그동안은 아무도 그러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달까요.-_-; "어찌됬든 우리가 딛고 있는 대부분은 시장이 아니더냐. 굳이 아닌거 고민할 필요 없어. 부자 되려면" 뭐, 이런...-ㅁ-;
  • leopord 2009/04/16 02:13 #

    1. 솔직히 이택광 님은 <한겨레21> 말고는 폴라니에 대해 딱히 접근하지 않았달까 그런 인상이 들었습니다. 이 소책자를 본 것 같지도 않고... 거꾸로 말해 굳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듣는 얘긴 있다는 거니, 폴라니가 우리나라 지식사회에서 꽤 돌고 있다는 반증도 되는 거 같네요.

    2. 박찬웅 교수가 재밌는 얘길 했네요.ㅎㅎ 여울바람 님을 통해서 듣기론 왠지 글로벌 거버넌스를 연상케 하는 주장인데요. (글로벌) 거버넌스 개념은 양극체제 해체 이후로 정치학 쪽에서 유행했는데, 요샌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 감이 좀 안 잡히네요. 특히 비교정치 쪽엔 거의 손을 못 대고 있어서...orz 꼭 거버넌스가 아니더라도 세계적 사회통제장치로 케인스가 제안했던 국제무역기구(ITO)와 국제청산동맹(ICU)의 발상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군요(금융경제연구회 http://studyfine.tistory.com/57 참조).

    사실 '경제인류학 콜로키움' 가입한 담에 첫 회 동영상만 보고선 다음 껄 못 봐서;; 틈틈히 봐야지 말입니다;

    3. 폴라니의 시장경제 비판 자체는 맑스의 관점과 뗄 수 없죠. :) 그런데 사회주의의 주류 담론이 맑스주의로 흘러가던 제2인터내셔널 시대라 해도, 사회주의의 다양한 조류-프루동주의, 수정주의, 오웬주의-가 공존하던 시대니 만큼 폴라니의 사상지형도 그만큼의 폭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혹시 김수행 선생님 강의의 마지막 제자신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축복받으셨군요.ㅎ 폴라니는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묘미가 있는 거 같아요. 그만큼 해석도 분분해지고. 시장을 폐지하지 않고도 변혁은 가능하다는 관점은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생소하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재밌어질 거 같아요.ㅎ 그런 의미에서 잘 부탁드린다능.ㅋ
  • leopord 2009/04/16 02:17 #

    사족 하나. 칼 폴라니도 그렇고, 마이클 폴라니도 그렇고, 이들의 딸아들인 카리 폴라니-레빗 하고 존 폴라니도 그렇고. 이 집안은 왜 다 천재냐능. (...)
  • ... 2009/04/16 02:37 # 삭제 답글

    (존칭 생략합니다)
    이택광이 말하는 지점은 단순히 폴라니가 아니라는것을 넘어서서, 애초에 대안이란 지식인이 만드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 조건을 인식할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란 주장 같습니다.

    그런점에서 (저도 콜로키움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만) 우석훈의 기획은 인류학 수업으로서는 괜찮으나, 대안 모색으로서는 조금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해요. 윗 리플에도 언급된 박찬웅과 우석훈의 충돌 지점도 바로 그부분에 있는것 같은데, 박찬웅은 폴라니의 관점이 추후 경제-사회의 진행을 분석하는 하나의 틀이 될수 있다 정도에서 넘어가지 않는 반면에, 그 콜로키움에 참여하신 우석훈이나 조한 등은 뭔가 끊임없이 넘어설 비전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좀 그날 질문이 핀트가 맞지 않았지요.

    그래도 그날 강의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새로운 경제-사회 체제의 새로운 정체성 찾기"에 대해 박찬웅이 침묵한 것은, 어쩌면 정확히 이택광이 짚는 것, 즉 주체, 윤리, 욕망의 지점에서 침묵하는 것이라 해석할수 있다고도 봐요. 어쨌든 그는 "사회과학자"이니까요.
  • leopord 2009/04/16 02:49 #

    앗 콜로키움 강의를 듣는 분들이 속속 오시니 저야 감읍(야;)할 따름입니다.

    폴라니의 관점을 '망원경'(내지는 '현미경')으로 보느냐, '컴퍼스'(내지는 '공구')로 보느냐의 차이일 수도 있겠군요.ㅎㅎ;

    사회과학자라는 규정은 어떻게 지어지는 것일까요. 박찬웅 씨 본인이 그렇게 설정했을지, 혹은 단순히 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을지. 비난하는 게 아니라, 지식인의 역할은 어디어디까지다, 라고 말하는 게 참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ㅎㅎ 한윤형의 마지막 문단도 아리송했어요. 인문학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게 사람들의 독해능력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인문학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 ... 2009/04/16 03:02 # 삭제

    전 Leopord님이 이택광이 짚은 인문학과 경제학을 단순히 인류학과 경제학, 즉 사회과학의 분파간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것이 잘못 짚은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를테면 이택광의 그 글과, 한윤형의 글은 경제학을 때려쳐야 한다거나, 폴라니 이론이 잘못됬다는 게 아니거든요. 다만 폴라니든 뭐든간에 그 이론에 기반한 전망을 찾기 전에, 지금-여기의 지점에서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이구요.

    이는 큰 차이를 갖죠. (제가 굳이 사회과학이란 말을 쓴 이유기도 한데) 사회과학이 한윤형의 글의 루시앨이란 사람이 말한 것처럼 (인용하면) "과학이 '실재'를 찾으려는 욕망과 깊게 관련되어, 때로는 가치 주장마저 그러한 '사실'들로 정당화하려는 것에 기인하지만, 인문학, 혹은 예술은 '활동'의 차원에서 주어진 현재의 상황 혹은 맥락을 규정짓고 실천하게 해주는 만큼" 둘이 가지는 접근 방법은 전혀 다르거든요. 물론 현재의 상황은 둘다 당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요.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구별되는데 (인류학은 분명 사회과학이지, 인문학이라 보기 힘들죠. 정성적 기술방법을 쓴다고 인문학은 아니죠.) 박찬웅이 침묵한 이유가 바로 사회과학자로서, 주어지지 않은 현실에 대해 현재의 상황을 기반으로 예측가능한게 있고, 가능하지 않은게 있는바, 적어도 현재 나타나는 경제 상황을 폴라니 식으로 분석할땐, 노동-토지-화폐 모두가 상품화가 된것이며, 아직 우린 이것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이에 맞는 체제가 어떤 것일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에서 제가 사회과학자라고 말을 한 것이지요.

    만약 인문학자라면, 사람들이 처한 바로 그 상황에서 "다른 꿈"을 꾸게 하겠지요. 음.. 퓨처워커 혹시 읽으셨는지..? 거기에 나오는 솔로쳐 내지 칼이 사회과학도의 마인드라면, 미를 움직일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게 하는 "파하스"의 역할이 인문학도랄까요..?

    저도 이해가 깊지 않은지라;; 비평해주시면 좋겠네요 :)
  • leopord 2009/04/16 04:51 #

    아유 이런 정치(精緻)한 토론이라면 두뇌가 근질거리는 맛으로라도 함께 해야죠.ㅎㅎ

    1. 인류학의 범주에 있어서는 제 쪽이 정밀하지 못했습니다. 학문의 범주를 따진다면 인류학은 사회과학이라고 해야죠. 그런데 여기서 혼란이 일어난 이유는 인류학의 대상과 방법론이 혼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인간사회의 언어와 문화, 생태를 직접적인 관찰과 체험을 통해 보고하는 식인데, 인류학이 여타 학문의 영역과 접속 혹은 침범하면서 연구분야를 확장할 때 인문학과 인류학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직접적으로는 문화인류학이라는 분야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탓이고(제 부족입니다.orz), 간접적으로는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으로 대표되는 비교신화학 같은 학문이 어느 분야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라는 의문 때문입니다.

    2. 또, 사회과학의 개념적 정의를 과거의 통계자료 및 관찰·기록과 현재의 예측가능한 변수를 고려해 사회의 현재상태를 분석하고 미래상황을 예상하는 학문분야라고 했을 때, 경제학에서는 규범분석이, 정치학에서는 정치사상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애초부터 사회과학이라는 분류 자체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이면서 인문학에서 떨어져나온 분류인 셈인데, 실증분석과 이념(규범)분석이라는 양대 틀 중 하나가 부재하는 사회과학이란 형용모순이라고 봅니다. 실증분석만 가능하다면 자연과학이겠죠(물론 경제학과 정치학에서도 자연과학에서 나타나곤 하는 실증-가치의 직결을 욕망하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sonnet 님의 경우 이런 점을 들어 (국제)정치학에 자연과학적인 정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파워의 비교 : 영향력과 잠재력 측면에서> http://sonnet.egloos.com/4083126).

    3. 2번에서 말씀드린 사회과학의 양대 틀로 보았을 때, 박찬웅이 '사회과학자'라면 주체, 윤리, 욕망에 대해 말을 삼갈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논의를 가로막는 건 오히려 인문학이냐 사회과학이냐는 분류는 아닐 겁니다. 그 단초가 된 것은 제 부족한 지식 탓이겠지만 말입니다.orz

    4. 논의를 위해 이택광과 한윤형의 글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인문학(자)'의 입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많다 싶어요. 다만 폴라니의 인문학자로서의 성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주었다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그런데 인문학자로서의 성격이라는 게 그의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면을 말하는 거죠? 궁금합니다.).

    5. 그렇다면 이택광과 한윤형의 문제의식이 정당성과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전제로 이런 의문이 발생합니다. 과연 지금-여기의 지점에서 (인문학이) 제기할 수 있는 '다른 꿈'이란 무엇인가? 꼭 어떤 학자나 발화를 끄집어내야만 한다 혹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추상적으로라도 주체와 윤리, 욕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또 하나의 고민이 이어집니다. 대안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 조건을 인식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인가? 라는 의문이죠.

    6. 저는 이 지점이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맑스처럼 꼭 세상을 변혁하는 철학을 만들어야 한다, 뭐 이런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철학의 무용함을 만드는 건 철학자 내지는 인문학(자) 자신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7. 이 점에서 이 논리도 이택광의 문제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문간 경계로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인문학이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얼 보여줄 수 있을까 라는 고민 말입니다. 저는 <퓨처워커>는 보지 못했고, <드래곤 라자> 하고 <눈물을 마시는 새>만 본 정도입니다. :) <눈물을 마시는 새>로 친다면 사회과학자는 라수 규리하이고, 인문학자는(그 누구보다도 실존과 몰락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케이건 드라카라고 해야할까요? 저야말로 흥미있는 이야기에 감사드립니다-
  • ... 2009/04/16 10:22 # 삭제

    빨리 일어나시는군요 ^^;

    1.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나누는 지점이 어디일까요? 인류학의 성격에 관한 문제는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것 같네요.

    1-1. 2. 제 생각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나누는 기준에 "사회과학의 개념적 정의를 과거의 통계자료 및 관찰·기록과 현재의 예측가능한 변수를 고려해 사회의 현재상태를 분석하고 미래상황을 예상하는 학문분야"라고 정의하는 방식은 중요한것을 빼먹고 있죠. (이는 기본적으로 E.H.Carr의 입장이기도 한데) 사회과학이란 기본적으로 "과거의 '사회적 사실'(Durkheim)을 미래를 기준으로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이요. 미래를 기준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사실 자신이 "실증적"이라 주장하는 모든 사회과학이 암묵적으로 놓고 들어가는 가정이죠.

    1-2. 2-1. 3. 문제는 이것이 Leopord님이 보는것처럼 정치하게 나뉘어지는것은 아닌것 같아요. 오히려 둘은 항상 묶여있죠. 사실 이건 논리적 필연성 때문인데, 사회과학은 잘 알다시피 반복된 실험을 할수 없잖아요. 그렇기에 애초에 가능한 모든 인과관계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작업이 필요하죠. 그리고 E.H.Carr는 사회적 사실과 "미래와 현재와의 대화"가 그 객관적 담보가 될수 있다고 보았지만, 슬프게도, 지금은 다들 아니란걸 알죠 :) (아 물론 복잡계는 일단 논외입니다;; System Dynamics는 춈;;;;;)

    하지만 인문학은 이런 틀에서 자유로워요. 제가 주체와 욕망, 윤리에서 사회과학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현 상황을 분석하는데 준거로 삼은 "미래"에 대해 침묵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문학만이 건드릴 수 있는 욕망과 윤리의 지점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거죠. 아니, 최소한 사실명제에 기반해서 가치명제를 도출할순 없다는 거죠. 즉, 박찬웅은 "이리이리 될것이다 (it's going to)"라곤 말할수 있죠. 하지만 "그러므로 우린 무엇을 해야 한다(we should/must do something)"이라 말할순 없다는 거에요. 이건 그의/사회과학의 논리에선 오직 "미래", Axiom으로서 존재할 뿐, 그걸 다시 도출하는 것은 순환논리 이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 박찬웅이 그 지점에서 침묵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2-2. 3-1. 그런 의미에서 "넌 사회과학자니까 침묵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씀드린 것이 아니에요. 그저 사회과학자는 그 논리의 일관성 때문에 멈춘다는거죠.

    반면 인문학자는 직접적으로 욕망과 욕구를, 상황에 따라 바뀌는 주체, 윤리를 다루죠. 물론 Nullmodel씨 같은 이는 라캉을 까긴 하는데, 이는 라캉주의자들이 이를 과학으로 격상시키려는 바보같은 짓을 하기 때문인것이라 보이고. 어쨌든 그런 점에서 인문학자가 짚는 것은 "욕망/주체를 인정한" 상황이라 보여져요. 즉, 과학적/비과학적을 떠나서 한 인간이 그저 지금-여기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를 짚는거죠. 바로 "그 바라보는 방식"이 누군가의 공감(흄이나 스미스의 용어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감정이입 혹은 문학작품을 읽을때 등장인물에게 느끼는 그런 공감을 말합니다.)을 얻어서 새로운 행동을 하는것을 바라는 거죠. (제생각엔 비록 그것이 시지프스의 신화일것 같지만.. ^^)

    이 두가지 점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며, 더불어 인류학은 사회과학이라 볼수밖에 없는게, 인류학이 대상으로 삼는것은 다양한 사회의 교환/생활 방식이지, "공감을 통한 현재 상황에 대한 행동"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건 어떤 과학도 될수 없어요.)

    그런점에서 이택광이 만약 우석훈에게 인문학자로서 말한다면, 폴라니 들먹이기 이전에, 우석훈 자신을 움직이는 그 욕망이 뭔가? 우석훈 당신이 한국 사회에서 주체로서 느끼는 그런 감정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어떤 텍스트를 통해 당신과 공감할수 있나? 이지점을 물을것 같아요.

    4. 그런점에서 폴라니의 인문학자로서의 역할을 짚는것은 원포스트 저자들의 능력을 벗어날수도 있거니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건 폴라니가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논의이죠.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인문학의 경계니까요.)

    5. 6. 누군가를 공감시키는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정도로 쉬운건가요..? ^^; 전 심지어 한 사람도 공감시키지 못해서 아직 솔로입니다만 :)

    물론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하지말자는 말은, 맞아요. 이를테면, 물을 끓이려면, 물에 집중할게 아니라, 먼저 밑에다 불을 때라는거죠.

    7. 음, 라수 규리하는 확실히 비유가 맞는것 같은데, 케이건 드라카는 플레이어인 만큼 인문학자라 보긴 힘들지 않을까요? ^^; 오히려 비아스 마케로우나 (케이건 드라카에게 너의 눈물을 마시겠다고 하는) 사모 페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기본적으로 인문학은 Play가 아니라, Critique이니까요.
  • leopord 2009/04/17 01:58 #

    논의가 근본적인 방향으로 향하지만, 수렴이 아니라 확장된다는 인상이 드는군요. :)

    인문학만이 건드릴 수 있는 욕망과 윤리의 지점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말씀은 오히려 방어적인 태도 같습니다. 물론 기존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실증을 통해 규범을 증명할 수 있는 쪽으로 자신의 '이념'을 옹호해 온 측면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사회과학자가 "이리이리 될 것이다" 라는 예측까지를 자신의 임무로 맡고,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 는 실천을 제시하는 것은 인문학에게 바통을 넘겨야 한다는 입장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을 너무 가르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면 실증은 사회과학적으로, 사유는 인문학적으로 해야한다는 걸까요? 물론 이것도 훌륭한 방법론일 수 있겠죠. 저도 인문학적 사유(이 말이 상당히 모호한 말이란 생각이 들지만.)가 갖는 힘, 주체-윤리-욕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걸 긍정합니다. 다만 지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러이러한 영역은 사회과학이고, 저러한 영역은 인문학이니 서로 각자의 영역을 탐할 생각 말고 자기 할꺼나 잘 합시다, 라는 입장 자체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각자 서로의 입장을 사회과학이다, 인문학이다 이런 식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논의가 겉도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사고(사유가 아닌)의 방식을 분류하는 건 그렇게 함으로써 사고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인데, 오히려 사고방식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끈을 애써 끊어버리는, 전문분과에 충실하면 그만이라는 쪽으로 사고가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학에 대한 정의와 범위는 님과의 대화를 통해 보다 잘 정리하게 된 것 같네요.ㅎㅎ;

    이쯤에서 박찬웅과 관련한 이야기는 접어두는 게 어떨까요. 이제 이택광-우석훈으로 가봅시다. 말씀하신대로 이택광이 우석훈에게 인문학자로서 말한다면, 폴라니를 젖혀두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봐요. 우석훈-폴라니가 뗄레야 뗄 수 없는 일체라는 건 아닙니다. 말씀하신 세 가지 질문(욕망, 주체, 감정)은 우석훈이 우리사회에서 폴라니를 제시하는 이유와 연동되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택광과 한윤형은 폴라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폴라니가 소비되는 방식이 어떻게 폴라니 자체와 무관할 수 있겠어요? 한윤형이야 이택광의 글에서 폴라니에 대한 정보를 일부 뽑아내고 거기에 G20 회담과정에 대한 지식 일부를 끼워넣었는데, 폴라니에 대해 겉돈다는 인상만 들어서 말입니다. 한편, 폴라니의 인문학자로서의 역할을 짚는 것이야말로 이택광이 접근해 볼만한 시도라고 봅니다. 폴라니를 하나의 대안인양 추켜세우는 설레발이 불편하다면 오히려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편, 아무래도 play와 critique에 대한 규정과 관심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문학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가본다면 철학자(역사가, 언어학자, 어쨌든 이 빈 공간에 들어설 수 있는 그 무언가)는 그저 관찰하는 존재일까요. 반대로 이른바 사회과학 내지는 자연과학은 non critique (말씀하신 critique의 반대개념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하다는 걸까요. 어쩌면 아직도 제 몸에 맑스의 언어가-비록 속류적인 형태로라도-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인문학은 단지 critique만 할 수 있을 뿐으로 선을 긋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은유에 불과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자(니체적인 고뇌와 실존과 몰락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캐릭터는 케이건 드라카인 것 같더군요. 비아스 마케로우는 좀 갸우뚱하게 되고, 사모 페이는 그녀의 가면과 내면의 불일치라는 점에선 합격인데, 결말의 뜨거운 포옹(불발로 끝났지만)은 critique와 좀 거리가 먼 거 같아요.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은유로 하는 오락이지만 말입니다. :D
  • ... 2009/04/17 12:35 # 삭제

    사회과학이 자신의 이념을 옹호한 측면이 전 근본적이라고 말씀드리는 거에요. 이건 김우재씨가 말하는 과학의 세속화하고도 이어지는 건데, 최소한 자연과학은 인과를 선택할 여지가 적어요. 실험이라는 것과, 측정량이라는 것은 설령 스콜렘-뢰벤하임 정리와 콰인의 논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나올수 있는 이론을 매우 한정시켜주죠.

    하지만 사회과학은, 설령 복잡계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과를 한정시킬수 밖에 없어요.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로빈슨의 사례가 그 좋은 예인데, 로빈슨이란 남자가 평소 담배를 즐겨폈는데, 그날 밤, 담배가 떨어져서 슈퍼에 담배사러 갔다가 차에 치어 죽었어요. 이때 차에 치어 죽은 "이유"는 정말 수도 없이 많죠. 로빈슨이 하필 그 "시간"에 나갔기 때문일수도, 담배를 피던 습관이 이유가 될수도, 그순간에 지나가단 차가 이유가 될수도, 그 차가 꼭 그 길로 지나갈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다른 모든 길의 교통체증이 이유일수도, 담배를 지금사러 나간건 로빈슨이 10분뒤에 하는 쇼를 즐겨봐서이니 그 쇼가 이유일수도.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에선 어쩔수 없이 "원인의 합리적 제한"이 이루어지죠. 그리고 카가 말하길, 이는 합리적인 설명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원인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야 된다고 하구요. 이는 "측정량"에 의한 제한이 이루어지는 자연과학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제가 말하는건, 애초에 사회과학자가 "합리적 설명"의 기준으로 삼는 그 공리, 전제가 이미 인간의 행동에 대해 무언가 "가치 명제"로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한번 사회과학이 "~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라는 거구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이 나눠져있다는 것이 아니지요. (첨언하면, E.H.Carr는 저 가치명제가 결국 진보로 향할 것이기에 객관주의적이라 보았지만, 전 그렇게 보진 않아요. :) 매우 주관적인 영역이라 생각해요. )

    따라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비록 사회과학자들은 실증과 과학을 매우 중시하긴 하지만) 그 중점이 다른 동일한 두개의 사유에 불과해요. 인문학은 "상황을 재규정"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다른 꿈"을 나타내려 하지요. 반대로 사회과학은 이미 "공리로서 합리적 설명의 기준이 되는 가치명제"를 세워 놓고, 그것을 통해 "인과관계 들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구요. (공리로서 합리적 설명의 기준과, 다른 꿈이 각각 가치명제로서 기능하고, 상황을 재규정하는 것과, 인과관계들을 나타내는 것이 각각 둘에서 사실명제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눈여겨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즉, 강조점이 다를 뿐, 똑같은 사유인 것이라 봐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반복되는 측정량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사유 방식을 인문학이다 사회과학이다 나누는 것은 당위의 차원이 아니에요. 논리의 차원이죠. 나누는 것이 무슨 목적이 있다거나 한것도 아니구요. 그저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이고, Leopord님은 제 말을 계속 당위의 차원으로 끌고 가시는것 같아서... 물론 제가 글을 잘 못쓴 탓이 분명 있습니다만. ㅠ_ㅠ 전 두가지를 양분해 놓고 자기것이나 잘하자라는 당위차원을 말씀 드리는게 아니라요, 애초에 접근에 있어서 두개가 차이를 보인다는걸 말씀드리고 싶은거에요. 물론 맑스의 자본론처럼 두가지가 혼용된 고전적인 시대가 있었지만, 고전은 고전이고, 이미 루비콘 강은 건넌지 오래지요. 그 뒤로 사회과학은 실증을 위한 측정량에 버금가는 것들 (사회적 사실이라던지, 무의식에 기반한 행동이라던지, 최근의 루만의 시스템이론이라던지) 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지요.

    우석훈이 폴라니를 제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도 나름 우석훈님 블로그 자주 들어가고, 콜로키움도 듣습니다만, "호혜의 경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 아닌가요? 근데 "왜" 우석훈은 그걸 만들고 싶어 하냐는거죠. 저도 알아요. 그런 호혜의 경제가 인간적이고 평등하고 뭐 좋은 말들이 붙은 것이겠지요. 그건 "당위"구요, 행동을 이끌어내는 공감과는 다르지요. "폭력은 나쁘다"는 당위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시위에 나서진 않아요. 오히려 "내 옆의 내 친구, 가족, 애인이 전경에게 쳐맞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때야 나서지요. 이택광이 묻는 지점은 바로 "우석훈이 지금 호혜 경제를 이야기하는 그 이유"를 묻는거에요. 당위가 아니라, "이유"요. 그가 공감하고, 이끌어 가는 이유. 이택광은 그것이 있을때, 대안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폴라니와 폴라니가 소비되는 방식은 관계가 있지만, 다른 차원이죠. 경제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경제는 경제가, 정치는 정치가 다루고, 오히려 양자간의 관련을 다루는게 (월러스틴이 각종 잡다한 학문의 집합소라 평가한 ^^) 사회학 내지 경제인류학인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이택광-한윤형이 폴라니 자체에 대해 왜 말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요. 오히려 그건 주장하는 이들이 입장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전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이나 둘다 critique 이상은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Player는 항상 critique 위에 있죠. critique은 Player를 쫓아다니면서 기술할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비아스 마케로우나 사모 페이를 든 것은 둘다 상황에 대한 해석을 극적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죠 :)

    ---------------

    제가 사실 논점을 확장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한 문장에 너무 많은것을 집어넣으려는 욕구인데, 이걸 구분해서 써야지 라고 마음은 먹어도 글이라는게 약간 관성이 있다보니;; ㅠ_ㅠ 암튼 최대한 노력했는데 어떻게 읽힐지 잘 모르겠네요 :)
  • ... 2009/04/17 12:54 # 삭제

    오타 수정을;;;

    5번째 문단의 마지막 줄, "자연과학이나"를, "인문학이나"로 고쳐서 읽어주셨으면 :) 그리고 밑에서 두번째 문단의 "입장"을 "입증"으로 고쳐서 읽어주세요 :)
  • leopord 2009/04/17 22:09 #

    여기서 잠시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군요. 님께서 사회과학의 범위와 역할에 대해 말씀하게 된 계기는 박찬웅과 우석훈과의 논쟁이었고, 이를 이택광의 지식인 비판(폴라니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겠습니다. 우석훈 비판이라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거 같아요.)과 연관 지으셨습니다.

    이건 님의 박찬웅에 대한 해석과 이택광의 지식인 비판이 같은 맥락에서 돌아가고 있다고 보시는 듯 한데, 박찬웅 본인의 생각-그것이 어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과는 좀 다르게 확장된 것 같군요.

    다시 돌아가서 사회과학-인문학 간의 긴장관계 해석과, 이택광의 우석훈 비판에 대한 해석이 따로 돌아간다는 인상이 듭니다. 앞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예시를 언급하며 사회과학과 인문학이란 결국 가치명제에 대한 입장/해석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기정사실화 했을 때, 그럼 사회과학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어요.

    제가 자꾸만 이야기를 당위로 끌고 간다고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전 님께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를 확인하는 걸 넘어 인문학의 위계를 끌어올린다는 인상이 듭니다.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닿을 수 없는 부분을 인문학이 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사회과학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실증을 가지고 가치를 규정지으며 인문학의 범위를 넘보고 있다. 이건 용납할 수 없다는 인상 말이지요.

    물론 악의적으로 해석할 생각은 없어요. 인상이란 많은 부분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전 학문이 건넌 게 루비콘 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학문의 분화와 전문화 경향이 아직 강하긴 하지만, 이 구분은 점점 옅어져 가고 있다고 봐요. 새삼 포스트모더니티 운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한편, 이택광-우석훈 비판에서 계속 동어반복이 발생하게 되는데, 질문은 단순합니다. "왜 지금 폴라니인가?" 이걸 우석훈이 당위로 보는 태도를 비판하는 거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논의는 빈자리에 폴라니 말고도 다른 누군가를 대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폴라니는 대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포함하게 된다고 봐요. 그리고 앞서 말씀하신대로 정치는 정치가, 경제는 경제가 다뤄야 한다면, '경제학자' 우석훈이 폴라니의 인문학자로서의 역량(내지는 가능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님의 논리에 따르자면 경제학자 우석훈은 '인문학자' 폴라니를 설명할 수 없을텐데 말예요. 그리고 우석훈은 인문학자 폴라니를 말할 수 없으니 우석훈의 폴라니 옹호는 무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님의 말씀엔 모순이 있다고 봐요.

    덧붙여, 우석훈이 폴라니를 제시하는 것은 "폭력은 나쁘다" 도, "내 옆의 내 친구, 가족, 애인이 전경에게 쳐맞고 있는 것을 본다면"도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당위는 맑스의 주장으로 충분히 제시가 되었다고 봐요. 사람이 당위만으로 움직여지지는 않죠. 공감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건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뭔가요. 말씀하신대로 사건이예요. 그런데 사람이 사건을 본다고, 공감을 느낀다고 바로 움직일 수 있어요? 똑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겪더라도 모두가 동일한 반응을 보이지 않잖아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혹은 배치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데요. 그렇다면 그 배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폴라니는 이 지점을 파고든다고 생각합니다(이건 좀 푸코적인 해석이군요.). 이건 당위를 '주입'시킨다거나 하는 작업이 아니예요. 당위를 깨뜨리는 작업이죠.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늘리는 과정이구요.

    우석훈(및 정태인)의 경제담론 30년설(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에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있다는 이택광의 지적은 이들의 아픈 곳을 찌르는 거죠. 이 점은 바로 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폴라니가 과연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혹은 가질 수 있는가. 아까 말씀드린 역량과 가능성 말이지요.)를 짚지 않고서 마냥 단정짓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논의가 흥미진진하긴 한데, 님의 다음 댓글로 마무리를 해야할 거 같네요. 곧 시험이라서 말입니다. 덕분에 긴장된 토론을 할 수 있었어요.ㅎㅎ
  • ... 2009/04/17 23:59 # 삭제

    제게도 흥미진진한 토론이 되었던것 같아요. 시험 잘 보시길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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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웅의 생각과 다르게 돌아갔을수 있죠. 분명 저는 박찬웅의 행위(침묵)을 놓고 그것을 해석(사회과학자라면 이론으로 예측되지 않는것에 침묵해야 한다는 것)했으니까요.

    사회과학이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란 질문은 제 논리에서 던져지긴 조금 힘들것 같은데요. 마치 제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를 없앴다고 생각하시는것 같은데, 제 생각엔 애초에 사회과학의 과학으로서의 정합성이 인문학 정도밖에 안되었다고 보는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예측하고 써먹기 위해서 모델의 입론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구요.

    제가 인문학의 위계를 끌어올리려 하는 것은 아니에요. 애초에 관심이 다르다는거죠. 간단하게 경제학과 마케팅과 심리학(여기선 카네만, 트버스키의 전망이론이나 행동경제학)이 추구하는 목적을 예시로서 살펴보지요.
    경제학이 수요에 대해 어떤말을 하나요? 경제학은 수요의 구성(완비성이니 이행성이니 등등)에 관심을 갖죠. 왜냐면 "교환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죠. 그러나 "실제 수요를 어떻게 바꿀것인가"는 순전히 마케팅/광고의 영역인 것이고. 또한 요즘 심리학에 기반한 전망이론, 행동경제학은 "왜 인간의 선호가 형성되는 건가?"를 관심을 갖는거구요. 전 이 구분이 절대적이라고, 혹은 이리이리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는것 같습니다만. 다만 대체적인 경향이 강조점이 다르다는 거죠. 이를테면 방금든 행동경제학의 형성과정만 봐도 그렇고, 인류학 같은 경우도 제가 물론 사회과학이라 주장했습니다만, 실제로 그 정성적 성격이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같이, 충분히 인문학적인 면이 있을수 있죠. 이는 개별 텍스트가 양가적 성격을 가지는것이고, 충분히 옮겨다닐수 있어요. 다만 대체적인 성향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정도면 충분히 사회과학의 대체적 성향을 짚기에 무리가 없다고 보여지기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것은 고전 사회과학에서 현재의 (수학 중심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의 경향의 가속화를 말하는 것이지, 당위적으로 "사회과학은 인문학과 분리될수 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죠. (요즘은 정치학에서도 무슨 선형대수나 위상수학을 쓰더군요-_- 월러스틴이 프리고진이나 복잡계를 차용했을때만 해도 뭐 그럴수도 있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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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훈이 폴라니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을 내놓아야 된다는게 아니에요. 이택광의 글의 의도는, 하나는 한윤형이 잘 밝혀 놓았듯 "인문학에도 뭔가 꺼리를 달라!"라는 숨겨진 요구와 함께, 두번째로는 대안을 내놓아봤자 받아들일 사람이 있냐는거죠. (그런의미에서 혹 시간이 되시면 콜로키움 박찬웅 교수 강의의 질문 시간에 조한과 박찬웅의 정체성 논쟁을 보시면 제 인용보다 더 나은 이해를 드릴것 같은데 ^^) 대안이라는 건 정체성 형성과 같이 가는거라는건 박찬웅이든 조한이든 인정하고 있어요. 그럼 폴라니에 따른다 해도, 국가별 시장이 형성되고 200년 정도가 지나서야 "국가"에 소속되어 활동한다는 정체성이 형성되었죠. 그럼 다음 대안이 가리키는 정체성은 언제쯤 형성이 될까요? 아니, 애초에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채 대안이 수용될수 있나요? 물론 현재의 시장이야 왕이란 한 권력의 중심점이 있었기에 시장과 함께 그에 맞는 정체성이 형성되었지만, 그럼 현재 호혜성을 받아들이게 할만한 권력의 주체가 있나요? 여성으로도, 계급으로도, 기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지금은" 묶이지 않을 뿐더러, 권력은 매우 분산되어 있죠. (물론 박찬웅이나, 저나, 미래에 어떤 정체성으로 묶일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우석훈보고 폴라니의 인문학적인 면을 설명하라고 누구도 하지 않았어요. (혹 제글의 어디가 그렇게 읽히는지만 지적해주시면 참 감사할텐데.. 시험이시니 ㅠ_ㅠ) 다만 폴라니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먹히려면, 그것을 받아들일 "주체"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는 거죠. 이는 이택광의 글에 잘 나와있는데...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에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 경제의 회복이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경제학적 담론은 ‘이렇게 해야 경제가 산다’는 예언적 발화를 넘어가기 어렵다. 진화생물학이나 경제학이나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다분히 경쟁의 구도이고, ‘진보’나 ‘좌파’도 이 구도에서 정당한 능력이나 고유한 속성을 보여주면 수용 가능하다는 ‘실용주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생산의 구조, 또는 주체의 ‘훈육’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한, 한국 사회에서 현실의 문제에 밀착한 비판이나 대안은 요원할 것이다."

    즉, 대안을 받아들일 정체성 있는 주체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혹은 대안을 "강제할" 권력을 제시하지 않는 한, 애초에 대안으로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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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라니가 인식을 재배치한다는 것은 좀더 근거가 필요할것 같네요. 다만, 사건을 "비평"해서 "새롭게" 보여주어 공감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작업이지요.

    여기서 다시 leopord님의 질문, "사회과학은 인간을 바꿀수 없는가?"에 대해 답해보면, 바꿀수 있어요. 합리적 설명을 받아들이면, 사회과학을 통해 충분히 어떤 예측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죠. 문제는 경제학/정치학이 잘 보여주는것과 같이, Player로서의 개인은 매우 미약하기 짝이 없다는 거고, 저 두학문은 보통 국가 단위에서 분석되며, 사회학의 차원으로 간다고 해도, 역시 특정 집단의 기획이 있어야 하는바, 현재 각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이리저리 분산된 채로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바꿀수 있냐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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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라니의 영향력과 별개로 그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주체"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가질수 있는가, 이부분을 비평한게 바로 제가 인용한 문단이라 생각해요. 폴라니가 매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현재 상황을 바꿀수도 있겠지요. (저는 "거대한 변환" 만 이제 일독을 했습니다만, 리프킨 등의 실증연구 (노동의 종말)과 맞물리면 호혜성이 충분히 하나의 경향으로 인정할만 한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과연 사람들은 폴라니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나요? 집단으로 나눠봅시다. 지식인층에서야 먹힐수 있죠. 학부생-대학생 단위에서도 어쩌면 먹힐수 있다고 봐요. 그럼 비정규직에게는? 여성에게는? 자영업자에겐? 그 이론이 "대안"으로 외쳐졌을때 과연 모두가 그것을 대안으로 사회에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이 있나요? 아니면 그 대안에 맞는 정체성을 갖고 있나요? 오히려 현 상황은 국가-시장에 걸맞는 정체성이 누구에게나 충분히 강한것 같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기업은 시장을 통한 해결방식으로 주목할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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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토론이었습니다. 시험 잘 보시길 :)
  • ... 2009/04/16 02:41 # 삭제 답글

    그런점에서 한윤형의 글은 "지식인"의 한계가 아닌 "과학자"의 한계라고 보아야겠지요. 한윤형의 글에 달린 리플에서 논의되듯, 사실명제로부터 당위명제를 도출하는데에는 (비록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지만) 한계가 있을수밖에.
  • leopord 2009/04/16 02:51 #

    좀 다른 얘기로, 전 요 근래의 '통섭' 논의의 사회적 힘을 긍정하지만 그것이 19세기 과학 환원주의로 가는 것은 아닐지 좀 의문이 들긴 합니다. sonnet 님이나, periskop 님, 김우재 님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 분들의 깊은 내공이 간혹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춤추고 있단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 ... 2009/04/16 03:08 # 삭제

    통섭은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진 않은지라... 다만 sonnet님이나 Periskop님, 김우재님의 내공은 사실명제에 머물러 있거나, 설령 무엇을 하고 하지말아야할지를 판단하는 경우라도 sonnet님의 경우는 Policy Process 수준에서, periskop님은 잘 모르겠고;;, 김우재님은 역사를 보고 참조해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긴 해요. 그리고 이런 것들은 그저 현재 상황에서의 상식적인 Framework라 생각되지, 이것이 무슨 19세기 환원주의는 아닌것 같아요.

    다만 굳이 통섭을 "의식적으로" 해야할진 의문이에요. 제가 파이어아벤트를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통섭이란 책이 없어도 이미 복잡계처럼 알아서 잘 연구하지 않습니까. 그냥 Anything goes로 놓아두어야 하는게 아닌지.
  • leopord 2009/04/16 05:15 #

    저도 이 분들이 19세기 환원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통섭이라는 개념이 다소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거 같아(저도 그에 따라 춤을 추긴 합니다만orz) 좀 조심스러워진다는 거지요.ㅎ 저도 기본입장은 Anything Goes이지만 말입니다.

    덧붙여 소넷 님과 페리스코프 님, 김우재 님 각각의 시각의 차이와 공통점이 엿보이는 글이 있어 링크합니다. 아마 이미 보신 글도 있겠지만요.

    periskop, <물리학과 경제학의 분수령을 찾아서> (http://blog.periskop.info/145)
    sonnet, <정치적 태도의 스펙트럼> (http://sonnet.egloos.com/3634097)
    sonnet,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 (http://sonnet.egloos.com/3637043)
    김우재, <보수주의자 소넷씨의 잡학다식에 관하여> (http://heterosis.tistory.com/44)

    periskop 님은 온건하고 열린 자세로 물리학과 경제학 사이의 새로운 접점을 모색하고 싶어하십니다만, 아무래도 물리학이 중심이 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한편 sonnet 님은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에서 <정치적 태도의 스펙트럼>에서 인용한 바라다트의 보수주의자 개념을 도킨스의 진화생물학과 연결하여 사회의 발전이 자연의 법칙(동역학)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우재 님은 이를 두고 sonnet 님이 자연과학을 사회과학에 무리하게 외삽하고 있으며, 자연과학과 다른 학문 간에 일종의 위계를 설정해 두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periskop 님은 sonnet 님의 관점에 대해 격려하셨고 말입니다.

    진보-보수를 떠나서 세 분의 관점과 논리전개 방식, 상호격려와 비판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여러모로 지적인 자극이 되어서 말입니다. :D
  • ... 2009/04/16 10:25 # 삭제

    이부분은 제가 치과를 다녀온 뒤에 :)
  • ... 2009/04/16 11:45 # 삭제

    음.. 근데 막상 딱히 할말은 없네요.

    다만 제가 보기엔 Demarcation Problem에 관해 sonnet님과 우재님은 부딪히는듯 하는데, 오히려 귤님(지금은 아이추판다 님이군요)과 sonnet님이 그 범위에선 차이가 있을뿐 한배를 탔다고 보여져요. Periskop님은 제가 잘 모르고.. 아마 기술자와 내부자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네요.
  • leopord 2009/04/17 02:03 #

    아이추판다 님 블로그는 링크는 했는데 잘 안 가게 되더라고요. 흠 왜 그럴까요.-.-;;;

    기술자와 내부자의 차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technician과 scientist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technician과 administrator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님과 이야기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지네요.ㅎㅎ;
  • ... 2009/04/17 11:55 # 삭제

    technician과 Scientist를 말하는 거죠 :)

    아 제가 좀 논점을 확장시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건 좀 죄송합니다 ㅠ_ㅠ 고쳐야 되는데;;
  • leopord 2009/04/17 22:12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ㅎ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4/16 08:53 # 답글

    폴라니가 생각했던 '시장을 통제하는 사회' 혹은 전세계적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세계적 사회통제장치'가 케인스의 국제무역기구와 국제청산동맹, 방코르화 혹은 그에 준하는 세계통화의 창설로 실현된다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케인스? (ㅎㄷㄷㄷ)
  • leopord 2009/04/17 00:50 #

    박찬웅 씨의 말이 자세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서, 케인스적 발상인지, 글로벌 거버넌스인지, 아님 다른 세계정부기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네요.ㅎㅎ

    다만 정말로 케인스 말년의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면...........

    최후의 승자는 싸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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