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난 학문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마냥 책이 좋을 뿐인 게 아닐까 싶다.
2. 학문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재능. 가정의 후원. 본인의 의지. 여러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정말로 필요한 건 끈기다. 오로지 주제 하나 잡고서 끈덕지게 달려드는 집념과 그걸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엉덩이. 그래서 모름지기 학자는 엉덩이를 소중히 해야... (응?) 김우재는 흔히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에 대해 20년은 공부해야 인문학자 소리를 듣는다는 말을 하면서 끈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과학의 정통적인 공부법>). 즉, 어떤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근본적인 부분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공부에 왕도가 없다지만, 사실 이런 게 왕도다. 니체를 논하려면 칸트부터 읽어야 되고, 먼저 플라톤이랑 댓거리해야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아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정말 맞는 건지, 내가 한 말은 역사속 혹은 세계중 누군가가 이미 꺼낸 말이 아닌지. 인터넷이 좋은 건 바로 그걸 확인하고 교정하고 보완할 여지가 좀 더 많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해서 살짝 잘못 말해도 밑천이 바로 뽀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3. 지금이야 학생이라는 포지션에 있기에 어느 정도 아카데믹한(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글-누군가에 대한 크리틱을 포함해서-을 쓸 수 있겠지만,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그런 분위기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아무래도 글이란 삶을 반영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만큼 유연해지고 능란해질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학구적인 정치(精緻)함은 사라진다는 말이다(periskop나 sonnet 같은 분들은 정말로 훌륭한 예외케이스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나는 제네럴리스트 Generalist는 되도, 스폐셜리스트 Specialist는 좀 힘들지 않나 싶다. 스스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취하는 관점이 보편적인 부분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고. 그런데 제네럴한 글쓰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말 그대로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이 얕다. 즉, 제네럴리스트가 얕고 넓다면, 스페셜리스트는 깊고 좁다. 포스트모던 중인(나는 그게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제네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사이의 구분마저 모호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둘 사이의 간격은 깊고 넓다. 그 부분이 슬슬 고민된다.
4. 보통 기자는 제네럴리스트고, 학자는 스페셜리스트라고 한다. 근대 학문을 포함해 모든 것이 전문화·세분화된 사회의 자연스런 역할분담이다. 이는 고대사회의 무경계성과 사통팔달함과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새삼 고대와 중세가 주목되는 이유는 경계가 사라지는 현대를 고스란히 반영하면서도 고대의 당대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여전히 근대의 자식인 학자들은 고대사회의 다층성과 풍부함을 알아보는 것이 난감하다(사료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지만.).
5. 그럼에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다종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쏟아져나온다는 것은 축복이다. 동시에 재앙이다. 지식과 정보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취할 것이냐는 방법론을 독자다중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지식인에 준하는 지식인, 학자에 준하는 학자, 기자에 준하는 기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걸 다중지성이라고 속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식의 속류화는 엘리트를 위협하지만, 그 속류화는 엘리트주의를 되려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에겐 시간이 없다. 진득하니 책상머리에 붙어앉아 엉덩이를 단련할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크릿> 같은 책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대신 쉽고 빠르게 세상의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유혹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수를 담은 듯한 이런 자기개발서가 여전히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시대의 관성과 함께 다중지성이란 개념에 손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속류적 지식이란 그 어떤 것보다 지배적인 관습을 반영한다.
6. 여전히 체계적인 독서보다 폭넓은 독서에 관심이 끌리기에, 분야는 다양해지고 (가뜩이나 없는) 깊이는 좁아지는 것 같다. 요즘은 로널드 사임의 <로마혁명사>(1939)를 읽고 있는데, 에이드리언 골즈워디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2000)에서 카이사르의 다중성과 불분명한 의도를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데에는 사임의 그늘이 있다고 봐야 한다. 사임은 로마 공화정의 과두정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로마 과두정은 귀족가문 간의 갈등과 알력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정치제도란 근대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클리엔텔라이와 같이 인격적인 관계와 계약적인 관계가 혼재해 있다.). 우리는 결과로서 역사를 바라보지만, 역사가에겐 그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과제가 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는 카(E.H.Carr)의 진술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역사란 결과와 과정(당대성) 사이의 전쟁이다.
7. 그나마 진득하니 붙을 수 있는 관심거리는 로마사 정도인 것 같다. 경제학은 솔직히 두번째. 무엇보다 고전학습과 주류경제학 학습이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상태에서(꼭 <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경제학과 수업 반년만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좀 애매한 기분이 든다. 재밌는 건 그럼에도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A.스미스의 <국부론> 정도는 읽었으면 싶어하는 것 같다는 거다. 내 생각이지만 그러려면 한 학기당 <국부론> 강의 하나쯤은 개설해줘야 할 것 같다. 단지 학생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부론>이 포괄하고 있는 경제사·사회사적인 부분과, A.마샬 이전의 비(非)수학적인 경제기술과 현대 경제학의 수학적인 기술을 매치시키는 부분(현대 경제학은 얼마든지 매치시킬 수 있다고 자부하겠지만)이 없으면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읽으려는 유인이 되기 힘들지 않을까.
8. 독서와 학문은 별개다. 많이 아는 것과 체계적으로 아는 것이 서로 다르듯이. 이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렇다면 이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나의 조건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자다. 고민은 지식과 정보가 과다하게 뿜어져 나오는 시대에, 나의 지식을, 밑천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다. 속류적인 지식과 함께 하면서도 그에 휩쓸리지 않을 방법. 그건 끈기 없는 나에게 엉덩이를 부단히 단련시키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하다.
2. 학문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재능. 가정의 후원. 본인의 의지. 여러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정말로 필요한 건 끈기다. 오로지 주제 하나 잡고서 끈덕지게 달려드는 집념과 그걸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엉덩이. 그래서 모름지기 학자는 엉덩이를 소중히 해야... (응?) 김우재는 흔히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에 대해 20년은 공부해야 인문학자 소리를 듣는다는 말을 하면서 끈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과학의 정통적인 공부법>). 즉, 어떤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근본적인 부분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공부에 왕도가 없다지만, 사실 이런 게 왕도다. 니체를 논하려면 칸트부터 읽어야 되고, 먼저 플라톤이랑 댓거리해야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아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정말 맞는 건지, 내가 한 말은 역사속 혹은 세계중 누군가가 이미 꺼낸 말이 아닌지. 인터넷이 좋은 건 바로 그걸 확인하고 교정하고 보완할 여지가 좀 더 많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해서 살짝 잘못 말해도 밑천이 바로 뽀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3. 지금이야 학생이라는 포지션에 있기에 어느 정도 아카데믹한(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글-누군가에 대한 크리틱을 포함해서-을 쓸 수 있겠지만,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그런 분위기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아무래도 글이란 삶을 반영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만큼 유연해지고 능란해질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학구적인 정치(精緻)함은 사라진다는 말이다(periskop나 sonnet 같은 분들은 정말로 훌륭한 예외케이스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나는 제네럴리스트 Generalist는 되도, 스폐셜리스트 Specialist는 좀 힘들지 않나 싶다. 스스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취하는 관점이 보편적인 부분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고. 그런데 제네럴한 글쓰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말 그대로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이 얕다. 즉, 제네럴리스트가 얕고 넓다면, 스페셜리스트는 깊고 좁다. 포스트모던 중인(나는 그게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제네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사이의 구분마저 모호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둘 사이의 간격은 깊고 넓다. 그 부분이 슬슬 고민된다.
4. 보통 기자는 제네럴리스트고, 학자는 스페셜리스트라고 한다. 근대 학문을 포함해 모든 것이 전문화·세분화된 사회의 자연스런 역할분담이다. 이는 고대사회의 무경계성과 사통팔달함과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새삼 고대와 중세가 주목되는 이유는 경계가 사라지는 현대를 고스란히 반영하면서도 고대의 당대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여전히 근대의 자식인 학자들은 고대사회의 다층성과 풍부함을 알아보는 것이 난감하다(사료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지만.).
5. 그럼에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다종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쏟아져나온다는 것은 축복이다. 동시에 재앙이다. 지식과 정보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취할 것이냐는 방법론을 독자다중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지식인에 준하는 지식인, 학자에 준하는 학자, 기자에 준하는 기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걸 다중지성이라고 속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식의 속류화는 엘리트를 위협하지만, 그 속류화는 엘리트주의를 되려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에겐 시간이 없다. 진득하니 책상머리에 붙어앉아 엉덩이를 단련할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크릿> 같은 책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대신 쉽고 빠르게 세상의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유혹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수를 담은 듯한 이런 자기개발서가 여전히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시대의 관성과 함께 다중지성이란 개념에 손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속류적 지식이란 그 어떤 것보다 지배적인 관습을 반영한다.
6. 여전히 체계적인 독서보다 폭넓은 독서에 관심이 끌리기에, 분야는 다양해지고 (가뜩이나 없는) 깊이는 좁아지는 것 같다. 요즘은 로널드 사임의 <로마혁명사>(1939)를 읽고 있는데, 에이드리언 골즈워디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2000)에서 카이사르의 다중성과 불분명한 의도를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데에는 사임의 그늘이 있다고 봐야 한다. 사임은 로마 공화정의 과두정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로마 과두정은 귀족가문 간의 갈등과 알력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정치제도란 근대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클리엔텔라이와 같이 인격적인 관계와 계약적인 관계가 혼재해 있다.). 우리는 결과로서 역사를 바라보지만, 역사가에겐 그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과제가 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는 카(E.H.Carr)의 진술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역사란 결과와 과정(당대성) 사이의 전쟁이다.
7. 그나마 진득하니 붙을 수 있는 관심거리는 로마사 정도인 것 같다. 경제학은 솔직히 두번째. 무엇보다 고전학습과 주류경제학 학습이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상태에서(꼭 <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경제학과 수업 반년만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좀 애매한 기분이 든다. 재밌는 건 그럼에도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A.스미스의 <국부론> 정도는 읽었으면 싶어하는 것 같다는 거다. 내 생각이지만 그러려면 한 학기당 <국부론> 강의 하나쯤은 개설해줘야 할 것 같다. 단지 학생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부론>이 포괄하고 있는 경제사·사회사적인 부분과, A.마샬 이전의 비(非)수학적인 경제기술과 현대 경제학의 수학적인 기술을 매치시키는 부분(현대 경제학은 얼마든지 매치시킬 수 있다고 자부하겠지만)이 없으면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읽으려는 유인이 되기 힘들지 않을까.
8. 독서와 학문은 별개다. 많이 아는 것과 체계적으로 아는 것이 서로 다르듯이. 이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렇다면 이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나의 조건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자다. 고민은 지식과 정보가 과다하게 뿜어져 나오는 시대에, 나의 지식을, 밑천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다. 속류적인 지식과 함께 하면서도 그에 휩쓸리지 않을 방법. 그건 끈기 없는 나에게 엉덩이를 부단히 단련시키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하다.












덧글
문화파괴 2009/05/06 13:33 # 답글
그럼에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다종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쏟아져나온다는 것은 축복이다. 동시에 재앙이다.---이 부분에서 상당히 공감을 느낍니다.
leopord 2009/05/06 14:22 #
축복이고 재앙이죠.ㅎㅎ 홍수 속에서 어떻게 떠오르고 헤엄쳐나갈 것인가가 관건이 아닐까요. 호러영화 분석이라니 흥미로운 블로그를 운영하시네요.ㅎㅎ;(전 호러영화를 좀 많이 싫어라 하지만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문화파괴 2009/05/06 16:07 #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점점 전문화되고 분업화되는 (이것도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적지않게 있겠죠) 지식들의 유기적 관계성을 찾아내는 것도 또 하나의 지식산업이 되지 않을까하는 재밌는 상상을 해본답니다.
처음엔 몰랐으나 호러영화 속에도 호러영화틱한 수사로 정치, 사회적 문제점들이 반영이 되고 있는 점을 발견하고 더욱 호러영화에 빠져 들었답니다. (공포와 정치의 역학관계) 지금이야 현실이 더 호러틱하지만요...-_-;;
leopord 2009/05/06 19:29 #
호러영화는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드러내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그 장르의 문법이 곧 공포의 주체와 대상을 드러내니까요.아닌 게 아니라 지금은 현실이 곧 호러이고 코미디인지라...-_-;; 장르가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되었죠. (응?)
백면서생 2009/05/06 16:57 # 답글
딜레탕트라는 낭만적인 개념도 있습니다. 오지랖이라고 보아서는 안되죠. 쉬운 예로, 과거 각 신문의 논설위원들이 대체적으로 이런 부류였는데,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쉽게 무시해서는 안되는 실력을 가진 분들이 많았습니다.최근에 외려 엉덩이의 무게로 인해 '박사'가 아닌 '협사'가 많은 것 같아 좀 그렇습니다만, 가치 추구와 당대성에 대한 헌신, 하나 더한다면 당파성의 도전을 한번이라도 정면으로 받아본 인문주의자라면 충분히 한 평생 떳떳할거라고 믿습니다.
leopord 2009/05/06 17:34 #
딜레탕트도 요즘은 적대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 덕분에 욕이 된 감도 있더군요.^^; 훌륭한 딜레탕트가 되기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사실은 이렇게 되고 싶어요. 하하;). 논설위원 중에 대표적인 분이 이어령 씨로 알고 있습니다. 정지용 선생도 그랬고. 다들 매서운 논객이자 통찰력 있는 당대 지성인들이었으니.사실 최재천이나 우석훈, periskop, sonnet, 김우재 등의 분들이 특이한 케이스이고, 이중 몇몇 분은 대중 지식인으로 두각을 받아서 눈에 띄는 것 뿐이고 상당수 많은 분들이 상아탑 안에서 협사의 길을 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상아탑과 광장 사이에서 (이론에 근거를 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만한 도전을 과감하게 내지를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좀 확신할 수 없네요.
가치추구와 당대성에 대한 헌신, 당파성의 정면도전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학교의 신복룡 선생을 내세워도 되지 않을까 싶군요(물론 초록불 님은 고구리 떡밥 때문에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듯 합니다만^^;).
다시날자 2009/05/06 19:12 # 답글
아, 농담이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은 엉덩이를 잘 관리해야되요, 습진이나 물집이 생기면 대략 안습(웃음)ㅋㅋㅋ
leopord 2009/05/06 19:31 #
그러게요.ㅋㅋㅋ 거기에 치질까지 있다면? 헐... (;;;)
Hendrix 2009/05/06 19:21 # 삭제 답글
깊이 -> shallow / deep 얕고 깊고넓이 -> narrow / wide 좁고 넓고
라고 꼰대처럼 지적해주고 싶었어.. ㅋㅋ
leopord 2009/05/06 19:31 #
오디소 지적질이야아~ ㅋㅋㅋ
여울바람 2009/05/07 00:45 # 삭제 답글
* 그래서 통섭을 번역한 최재천 씨는 '스폐셜리스트들의 협업'을 통해서 깊고 넓은 탐구가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습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강력히 설파하고 계시지요.(통섭의 교주..-_-;)* 고전학습과 주류경제학학습은 전혀 다른 것이였던 거였나요?!(두둥!) 경제학 개론 수업에서 '국부론'을 팀발제로 내주던데 말이죠.(…쌤이 이상한 거였던가;) 주류경제학이라 함은 신고전학파의 경제학을 말할 텐데, 실은 경제학이 '수학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기에 그 사이를 연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좌파적(학교쌤은 이를 맑스적인 걸로 번역하시더군요.-_-;)인 '미시경제학' 같은 것은 없나요? 라고 도발적 질문을 던지니, "자본주의 이해하기" 와 "새정치경제학"이란 책을 언급하시더군요. 아직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_-;) 이게 어떤 '열쇠'가 되지 않을지…
사족이 많았으나, 실은..제가 주류경제학(신고전학파)보다는 경제학 사상 전반이랄지, 레오포드님이 말하는 역사·사회적 경제학에 관심이 많은지라..경제 고전이 경제학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안했던 건지도 모릅니다.-_-; 오, 솔직히 수리경제학을 창시했다고 하는, 로쟌학파의 레옹 왈라스가 미워요. 엉엉.
뭐, 역사적으로 왈라스는 문과에 가까운 소설가 지망생이었고(소설은 망했지만…), 수학을 참으로 못해서 여러번 대학에 낙방했으며, 수리 경제학의 수학적 이론을 위해 공부하면서, 다른 대가들에게그것들을 손수 편지를 써서 보내서 의견을 물을정도로 끈덕진 인간이였다는 점을 보면, 천재 유형의 존스튜어트 밀 보다야 훨씬 친근하긴 합니다만.(…)
leopord 2009/05/08 00:55 #
1. 통섭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분과) 사이의 인식론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대화를 이글루의 모님과 나눴던 거 같은데 어느 분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백투더소스 하자매!;;;). 미국이야 실증주의적·구조기능주의적 방법론이 보편화된 덕분에 통섭이 가능한 줄로 아는데, 아무래도 그 외의 나라·분야에서는 좀 쉽지 않은 구석이 있는 거 같아요.2.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혀 관계가 없더군요.-_-;; 주류경제학의 공리를 이해하는 데에 <국부론>이 직접적으로 필요하진 않아요. <맨큐의 경제학>이 모든 경제학을 설명하는 건 아니어도, 그래프와 수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편화된 주류경제학에서 <국부론>을 읽어야만 하는 유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3. 저 개인적으로는 <국부론> 수업 하나쯤은 좀 있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위에 적어놓은 단서들을 달아놓아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저도 경제학설사와, 주류경제학이 포괄할 수 없는 분야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확실히 <국부론>을 팀과제로 하신 건 교수님과 학풍의 차이가 크죠. 사실 국내에선 그냥 혼자(...)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수유+너머와 필통이 있긴 하지만;).
4. 맑스주의자 경제학자(맑스주의 경제학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해서;)들도 수학 잘 하는 분들 많던데요-_-;; 언젠가 맑스주의자 경제학자 분들(김수행 선생 포함해서)의 논문을 모아놓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스미스적인 글쓰기를 하는 정치경제학이겠거니 했더니 수식들이 주루룩 나열된 부분들이 꼭 한 단락씩은 있어서 좀 놀랐습니다(맑스도 <자본론>에서 계산을 하긴 했던 거 같은데, 여적 읽지를 않아서 확답은 못하겠군요.).
5. 사실 레옹 발라(왈라스) 뿐 아니라 쿠르노, 튀넨, 멩거 등이 경제학의 수학화에 일조했지만, 이를 주류화한 공은 한계(효용)학파의 거두 알프레드 마셜에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전까지 정치경제학으로 불렸던 경제학에서 '정치'라는 이름을 제거했을 뿐더러, 케임브리지에 경제학과를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경제학의 시대를 시작한 셈이니까요(유럽 쪽에서의 한계학파의 활동에 무지한 상태에서 이 말은 좀 위험하긴 하군요.).
6. 레옹 발라에게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 자신의 모자란 점을 채워나가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분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네요.
세라피타 2009/05/11 16:01 # 답글
정말 끈기죠 끈기 ;ㅁ;....아 링크 업어가겠습니다
leopord 2009/05/16 03:41 #
아 늦게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