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02 무한회귀의 주인장

1. 이번 주는 매일 스케쥴이 있었다. 월요일은 가게 예전 동료들과 <트랜스포머2> 보고 술자리, 화요일은 <오감도> 시사회, 수요일은 모 기독교 잡지 편집진 미팅, 목요일은 또 다른 곳과 미팅. 월요일에는 종로3가 곱창거리에서 먹고, 수요일은 창신동에서, 목요일은 낙원상가 쪽과 인사동을 돌았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종로는 참 매력이 있다. 낡고 기울어진 벽 틈으로 과거의 먼지가 폴폴 날리고, 대문 위에 놓인 화분이 따스한 햇살을 마음껏 받는 한가함이 있다.


2. 시험성적이 나왔다. 여기 올릴 땐 교수님들 이름을 지울까 했지만 이미 몇 번 얘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지울 것까지야. 예상보다 훨씬 좋게 나와서 좀 놀랍기도 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B+이 나왔으면 A였으면 싶고, A면 A+이었으면 싶은 것. 다른 건 몰라도 <한국경제론>은 A 이상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중간고사 크리가 컸는지도. 아마 이번 학기 성적이 역대 학기들 중에선 가장 나을 게다. 다음 학기엔 또 어떨까 모르겠다.

3. 앞으로 뭐할 거예요. 묻는 쪽에선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인데 내 쪽에서는 들을 때마다 당혹스러운 건, 내가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도로 얼버무리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저 현실에 충실하면 잘 되리라 생각하는 건 나이브하고. 그럼에도 아직은 '지금/여기'에 급급하다. 좀 더 멀리 봐야 한다.


4. "먼 옛날. 힘이 곧 모든 것이었고, 강철의 가르침과, 어둠을 주관하는 악마가 지배하는 제테기네아라 불리는 시대가 있었다." 비장한 문구로 시작하는 시뮬레이션 RPG <택틱스 오우거>(1995)를 다시 켜봤다. 슈퍼패미콤 유저에게는 무척 익숙한 타이틀로, 이후 <파이널판타지 택틱스> 시리즈를 비롯해 SRPG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파이널판타지 택틱스>야 제작자가 아예 회사를 옮기면서 만들었기도 하고.). 판타지 장르 하면 흔히 떠오르는, 중세풍의 장엄한 서사시와는 다르게 민족분쟁, 제노사이드, 권력투쟁 등 현실정치적인 스토리라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비장감을 극대화시켰다('발레리아 민족해방전선' 이라던가.).

제대로 클리어한 건 <전설의 오우거배틀>(1993) 뿐이었는데, 학부 1학년 때 들은 <게임·애니메이션의 이해> 수업에서 이 게임 공략을 과제로 냈던 기억이 난다. (...) 재밌는 건 이 게임의 영어 제목인 Orge Battle과 부제 The March Of The Black Queen은 다름 아닌 퀸(Queen)의 두번째 앨범 QueenⅡ(1974)의 타이틀이라는 거. 아니나 다를까 <택틱스 오우거>의 부제인 Let Us Cling Together 역시 퀸의 1976년 앨범 <A Day At The Races>의 타이틀 <Teo Torriatte(Let Us Cling Together)>에서 따왔다. 제작자가 퀸의 광팬 아닐까. 게임의 기획은 <전설의 오우거배틀>이 오우거배틀 사가 에피소드 5, <택틱스 오우거>가 에피소드 7이라는 식으로 스타워즈 시리즈의 컨셉을 따왔다. 당연히(?) 에피소드 사이의 여백은 설정으로만 존재하는데 닌텐도 64용 게임 <오우거배틀 64>(1999)가 그 여백을 메우긴 하지만 이미 마츠노 야스미가 회사를 빠져나간 다음이라 평판은 그닥 좋지 않다.

여담이지만 제작자인 마츠노 야스미는 경제학과 출신의 젊은 인텔리로, 업계에선 '감독'이라는 흔치 않은 타이틀을 달았던-비슷한 케이스로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의 코지마 히데오 정도-인재인데, <파이널 판타지12> 제작 중도탈퇴 이후 요즘은 뭐하는지 모르겠다. 한 때는 이런 게임제작자가 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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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백면서생 2009/07/03 04:09 # 답글

    <The March Of The Black Queen>은 저도 듣던 노래인데 말입니다. 성적을 저리 과감하게 공개하시다니, 역시 자신감이 가득한 주인장이십니다. 축하드리고, 다음 학기도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Let us cling together는 처음 듣는데, 문자 자체로 좋은데요. 멋진 말입니다. 93년이면 저는 무슨 게임을 하고 있었을까요. 생각중입니다.
  • leopord 2009/07/03 04:24 #

    별로 자랑할 성적은 아니지만 어차피 그 동안 수업 얘기한 거 마무리(?)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성적조차 오늘의 일용할 포스팅꺼리로 만드는 습관 때문일 겝니다;;

    번역하면 '손을 맞잡고' 가 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좋은 뜻이예요. 참 그게 쉽지 않은데.

    앗. 서생님도 게임을 하셨군요! 왠지 게임은 안 하셨을 거 같다는 건 저만의 착각이고 편견이었을까요. ㅎㅎ;;;
  • 백면서생 2009/07/03 12:58 #

    웬걸요, 테트리스, 헥사, 지뢰찾기, 워크래프트1, 워크래프트2, 스타크래프트, 아 그리고 둠, 컴맨터 킨, 듀크 뉴켐... 쓰다보니 마구 생각납니다. 모두 쉽고 간단한 게임들이지요. 아 페르시아의 왕자도 있네요. 제가 했던 게임들의 특징은 모두 '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
  • leopord 2009/07/03 15:37 #

    헉... 둠과 듀크뉴켐을 하셨다니...;;; 저도 머리 잘 안 쓰는 게임 좋아해요.ㅎㅎ; 게임 자체를 잘 하지 못해서 그렇다 뿐;; 전 PC게임 보다는 가정용 게임기 게임을 좀 했답니다.
  • 백면서생 2009/07/03 15:44 #

    듀크 뉴켐 1이었을겁니다. 컴맨더 킨은 1부터 6까지 모두. 모두 페르시아의 왕자보다 그래픽이 못한 횡스크롤 게임들입니다. 둠은 1과 2(맞나?), 그 변주인 헥센과 헤레틱. 그보다 앞선게 울펜슈타인이군요. 방금생각났어요. 처음에는 멀미를 하기도 했지만 누구나 열광했던 3D게임! 같은 시기에 삼국지 류도 유행했는데, 말한대로 게임은 머리 식히기 용이라 골아픈건 싫어서리...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려워서 못했습니다. 역시 나이를 먹는다는건 솔직해진다는 것이로군요.
  • leopord 2009/07/04 09:06 #

    저도 3D게임은 처음엔 멀미 날 거 같았는데, 하다 보니 계속 하게 되더군요. 중독성이 정말 높아서 아찔한 기분도 들었습니다.ㅎㅎ;

    나이를 먹는다는 것. 곧 솔직해지는 것이라면 저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요.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7/03 04:46 # 답글

    2. 아아, 그저 부러울 뿐.....
  • leopord 2009/07/03 15:37 #

    이거이 자랑할 성적은 아니건만 이 놈의 일용할 포스팅 땜시-_-;;;
  •   2009/07/03 05:07 # 답글

    공격계 타로카드 신나게 쓰고 오피니언리더 레벨만 죽어라 올렸더니
    카오스프레임이 작살나서 배드엔딩이 나왔던 슬픈 기억이... ㅇ<-<

    반가운 타이틀 화면이군요 :)
  • leopord 2009/07/03 15:38 #

    앗, <전설의 오우거배틀> 하셨군요.ㅎㅎ 전 진엔딩루트를 탔기 땜시... 삼신기 하고 주요 캐릭터 다 모아야 볼 수 있습죠. 그러고 보니 배드엔딩은 본 적이 없네요. 이것저것 다양하게 봤어야 했는데 흠;
  • Hendrix 2009/07/03 07:30 # 삭제 답글

    성적을 공개하는 게 이런 느낌이군하.. -_-;;;
  • leopord 2009/07/03 15:38 #

    뭐 그렇지;
  • 소시민 2009/07/03 09:14 # 답글

    좋은 성적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
  • leopord 2009/07/03 15:39 #

    아뇨. 사실 정말 자랑할 성적은 아니건만; 어쨌든 감사합니다.ㅎ;
  • 국화 2009/07/04 00:45 # 답글

    저에게 서울은 홍대 신촌 또는 종로 가끔강남 .. 이렇게 발자국을 내는것같습니다 .
    그중 종로는 자주안들려주면 서운하다는 :-)
  • leopord 2009/07/04 09:04 #

    전 강남은 좀 정이 안 가요. 홍대야 일하는 거 때문에, 신촌은 그 쪽 근처라 다니고, 그런데 종로는 어쨌든 꼭 가게 되요. 약속이 있든, 혼자 마냥 걷고 싶을 때든. 그래서 더 종로를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어요.ㅎ
  • 국화 2009/07/05 01:30 #

    강남은 정말 싫지만 어쩔수없이가야한다는 . 우선 강남은 밥 맛있는곳찾기가 모래에서 김서방찾기죠
  • Mitena 2009/07/04 00:54 # 답글

    오오 성적... 아아 성적.... 성적.....OTL 받고나니 잠이 안오더군 후....ㅜ.ㅜ
  • leopord 2009/07/04 09:04 #

    후 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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