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pord의 무한회귀



현대성의 경험 서평

근대(modern)라는 말은 이제 낡고 고루한 말이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던(post-modern)이 근대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현대'로 인식되지, 근대도 포스트모던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시장의 트렌드로 소비되었을 뿐이고, 근대는 역사적으로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탓이다. 무수히 생성되고 파괴되는 역사. 모더니스트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윤호병, 이만식 옮김 / 현대미학사, 1994)은 책이 출간된 1982년을 배경으로 약 200년에 걸친 모더니즘의 역사를 풀어냄으로써 당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더니즘 공격을 방어한다. 그로부터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투쟁의 기록 자체도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작품은 묻는다. 모더니즘의 시대는 정말로 끝났는가?

마샬 버만이 바라보는 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그 자체로 근대 건축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끊임없는 생산과 번창을 근본적인 속성으로 삼는 모더니즘은 곧 이 상징을 파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고 허무주의적이다. 그래서 <현대성의 경험>의 정수는-마샬 버만이 꾸준히 환기시키듯이-<공산당 선언>의 이 문구에 집약되어 있다.

고정되고 쉽게 결속되는 모든 관계는 일련의 진부한 아이디어 및 견해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고, 새로 형성된 모든 아이디어와 견해도 그것이 응고되기 전에 쇠퇴된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 신성한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 되고, 인간은 마침내 냉정한 감각으로 자신들의 생활의 실제조건과 자신들의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책의 원제인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 : 현대성의 경험>이 고스란히 드러내듯이, 이 책은 맑스의 모호한 은유에 담긴 뚜렷한 의미를 밝히는데 온 힘을 쏟는다. 이를 위해 버만은 문학을 통해 역사적 현실과 문학적 은유가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밝힌다. 그 작업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부터 시작된다. 무수히 변화하고 창조하고 파괴하는 모더니즘의 본질을 선구적으로 반영한 <파우스트>는 그 자체로 '발전의 비극'이다. 파우스트 박사가 몽상가에서 연인으로, 마지막에는 건설자(창조자)로 변화할 때 변화의 구간마다 관계는 파국을 맺고 하나의 세계는 파괴된다. 그러나 이 파괴는 곧 자아의 변화에서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단절이기도 하다. 파우스트가 건설하려는 세계는 산을 깎고 강을 메우고 바다를 막아 세우는 세계다. 곧 토건의 세계다. 여기서 작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살해당하고 마는 미개발지역의 노부부는 '지금/여기'의 철거민의 신화적 원형이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은유한 아프락사스(알을 부수고 세계를 뛰쳐나오려는 새)는 모더니즘의 우상인 것이다.

모더니즘의 거대한 축은 수많은 파우스트들이 건설했다.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그랬고, 파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건설한 19세기의 오스망이 그랬고, 뉴욕 안에 횡단 고속도로를 건설해 브롱크스를 파괴한 로버트 모세스가 그랬다(여기에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박정희가 들어갈 게다.). 여기서 맑스는 모더니즘의 파괴-창조의 변증법을 통찰한 탁월한 모더니스트다.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역동의 혁명가다. 그러나 결국엔 지옥에서 올라오는 마법의 힘(자본의 끊임없는 축적과 확장, 생산-소비의 불일치에 따른 공황)을 통제하지 못해 무너질 불완전한 존재다. 맑스가 처한 곤경은 모더니즘과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이, 모더니즘의 부정적인 힘을 통제할 세력인 노동자 계급과 공산주의 세계의 완전성, 일관성을 보충해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과연 사회주의는 모더니즘의 광포한 파도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맑스가 대안을 제시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보다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것은, 그래서 끝내 모더니즘의 역동성에 대한 통찰이다. 마샬 버만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서의 '근대인'에 희망을 품고 있다. 그 점에서 버만 역시 맑스주의자이고 모더니스트다.

모더니즘과 자본주의, 맑스주의가 서로 충돌하고 교류하는 관계망을 바탕으로, 버만은 <제3장 보들레르 : 거리에서의 모더니즘>과 <제4장 페테스부르그 : 저개발의 모더니즘>, <제5장 상징의 숲 : 뉴욕에서의 모더니즘>에서 문학과 미술, 음악, 건축을 통해 모더니즘의 상이한 역사를 생생히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보들레르와 푸쉬킨,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에서부터 마셜 맥루한, 앨런 긴즈버그, 장-뤽 고다르와 밥 딜런까지 예술가들은 모더니즘의 또 다른 축으로서-그 반대편에는 파우스트들의 건설의 모더니즘이 있다-자유와 해방의 모더니즘을 생산하는 것 같다. 모순은 이 두 가지 모더니즘이 서로를 온전히 반대하는 힘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샴쌍둥이라는 은유가 좀 더 어울릴 게다. 버만은 여기에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소박하다.

기억하기(memento). 버만은 자신이 살았던 브롱크스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에 어린시절 브롱크스의 기억을 새겨넣는다. 이 환상에 대한 묘사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한나 아렌트가 불확실하고 연쇄적이어서 종종 파괴적인 인간의 '행위'를 보상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약속'과 '용서'가 여기서도 재현된다(leopord, <인간의 조건>). 버만이 모더니스트로서 제시하는 발전의 전략은 오히려 모더니즘적인 발전과 반대된다. 세계를 파편화시키고 허무주의에 빠져 발전을 포기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리요타르,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등에 대한 비판은 약간 꼰대스럽다-에 반대하면서도, 1960년대의 '거리의 혁명'과 1970년대의 급속한 보수화를 겪은 미국 좌파의 무력함이 언뜻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누구도 지금/여기를 근대라고도, 탈근대(포스트모던)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현재는, 그저 현재일 뿐이다. 자본주의 역시 무수히 변화하고 근대적인 생산-소비가 힘을 잃은 지금/여기에서도,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모더니즘적 상징(발전과 성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면 이 책의 문화사적이고 사회사적인 접근도 20년의 시간을 넘어 약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핑백

  • leopord의 무한회귀 : 인문 고전 강의 2010-07-01 00:37:47 #

    ... 존주의자는 근대인이다.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에 녹아버리도록 만드는 힘. 그 힘이 곧 근대성이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근대인이다(leopord, &lt;현대성의 경험&gt;). 6. 강유원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를 거쳐 다시 고대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은 사람, 인문학적 교양을 쌓은 사람을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소년'이라 ... more

덧글

  • Hendrix 2009/09/19 17:08 # 삭제

    버텨서 이겨냈군. ㅎㅎ
  • leopord 2009/09/19 17:23 #

    ㅋ 뭐 그냥 그래.
  • 비여우 2009/09/19 21:02 #

    잘 읽고 갑니다 ^^
  • leopord 2009/09/19 21:08 #

    넵ㅎ
  • 발산과 수렴 2009/09/19 21:16 #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모더니즘적 상징(발전과 성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면 이 책의 문화사적이고 사회사적인 접근도 20년의 시간을 넘어 약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인터넷에서 제기하는 MB문제와도 연관되는 것 같네요.

    한국사회를 이런 관점에서도 볼수 있다니 좋군요.

    덕분에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다시 분석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leopord 2009/09/19 21:46 #

    문화비평, 사회사 관련해서 상당히 비중있는 책으로 알고 있어요.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기왕이면 개정판으로 보시길.ㅎ
  • 비르투 2009/09/23 00:45 #

    어째 우리나라는 근대의 '합리성'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겉모습인 '파괴와 건설'만 배운 것 같습니다.
    이성 중심 시각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이성을 갖추고 그 한계를 깨달은 후에 일어나는 것이지 무턱대고 이성을 부정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우리나라는 일단 합리성부터 갖추고 시작해야 합니다.

    철학관련 전공을 하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에 너무 짜증나요. 모더니즘의 체계를 부수긴 했는데 새로 세운 게 없어서(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고 있는 듯) 혼란스럽고 공허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나마 실존주의는 자아를 내세우는데 자아마저 부정하는 사상들은...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대로 이해 못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leopord 2009/09/23 01:34 #

    합리성부터 갖추고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의미와는 관계없이 이택광 님의 '정상국가' 라는 단어가 떠오르는군요.ㅎㅎ

    포스팅에서 한국의 거리와 모더니즘을 단적으로라도 제시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군요. 물론 간단한 테마는 아니고, 또 이미 출판물로 몇 가지 선례가 있지만 말입니다(특히 1920-30년대 경성과 모단뽀이를 다룬 책들).

    우리나라의 모더니즘도 큰 틀에서는 로버트 모세스와 오스망의 모더니즘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 거 같아요. 모더니즘의 기원이 서구라는 점을 감안하고, 서구에서도 전통과 권위에 대한 방어가 보수주의의 주된 정서가 되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비합리성이 꼭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폭이 꽤 넓은 편인데, 90년대 우리나라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식시장에 들여온 사람들이 너무 편파적으로 개념을 소모한 감이 있지 않은가 거칠게 생각해 봅니다. 전 버만이 푸코나 데리다를 확실히 이해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70년대 미국의 허무주의적인 지적 경향에 현대 프랑스 철학이 미친 영향에 대한 반감과 반박 정도라는 생각? 재밌는 건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 유행에 대한 구좌파(이들 또한 모더니스트죠.)의 반응이 꼭 버만과 같았다는 점입니다. 저항과 반역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게 주된 이유였죠.

    덧붙여 모더니즘의 저항의 기획 또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죠. 하나는 구 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현실이고, 또 다른 약점은 중앙집권적-하달식(up to down)-전위적 혁명운동 및 전략이 포스트 포디즘의 소비사회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장, 이에 따른 블록 붕괴와 계급·계층의 다변화, 덧붙여 치솟아 오르는 젠더·인종·종교·지역 등 다양한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뭉뚱그려 설명되곤 했던 사상들은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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