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끝났다 무한회귀의 주인장

주말과 겹치는 바람에 많은 이들에게서 "이번은 도무지 추석 같지 않아!" 라는 비난(?)을 듣는 올해 추석도 이렇게 끝나간다. 모종의 변수로 터미널에 늦어버린 바람에 나와 룸메이트 자리는 다른 사람 차지가 되었다. 예매해둔 표도 못 써먹고 간신히 다른 자리에 타야 겨우 집에 내려갈 수 있었다(돈도 따로 내야 했다니!). 여느 때처럼 귀경길은 붐볐지만 버스에서 잠 한숨 때리면 그만이었다. 고향이라고 해봐야 딱히 감상에 젖을 이유는 없었다. 그곳은 내겐 여전히 어렵고 지겹고 두렵다. 그럼에도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도시인지 시골인지 제 정체성을 분간 못 하는 어중간한 시내의 한가함이, 그리고 날 이해하진 못하지만 받아들여 줄 수는 있는 가족은 내가 여전히 그곳을 찾게 하는 이유다.

이번에도 즈질 폰캠; 고추에 꽃이 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예 다른 줄기인 것 같다. 이름 모를 꽃이다. 의외로 예쁘다.


우리집을 지키는(?) 멍멍이. 이름은 뚜뚜. 언젠가부터 우리집 개들은 여자애던 남자애던, 어리던 자랐던 이름이 뚜뚜가 되어버렸다. 이 녀석은 먹는 것도 밝히고 이뻐라 해달라고 조르고 원체 가만히 있는 녀석은 아니다. 따땃한 햇살 속에서 졸고 있는 녀석의 정면샷을 잡으려 했더니 고개만 홱홱 돌린다. 못된 것.

가족묘가 있는 산에 오르다 보면 뒤가 탁 트인 길을 지난다. 디카라도 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쉬워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저 해안선 어딘가엔 초소가 드문드문 서 있고, 내륙보다 싸늘한 바람이 바닷바위를 스치고, 성마른 파도가 모래를 침식한다. 바다가 보인다.

종조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작은아버지가 살던 집. 명절이면 온 식구들이 이곳에 모이곤 했다. 두 분 내외가 모두 세상과 이별하신 후, 이제 여기를 찾는 발걸음도 부쩍 쓸쓸하다. 곧 이곳도 사라질 거라 했다. 산 전체가 개발지역으로 묶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도 이렇게, 사라져간다.

저 복도를 들락날락 하면서 상을 나르고 음식을 먹고 사촌들과 놀곤 했다. 나무 틈새로 모기향 냄새가 나던 걸로 기억한다. 왼쪽 끄트머리에 달린 문을 열면 서늘하고 조용한 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 전에 고장나 제대로 써 먹을 수 없는 286 PC 한 대가 방의 주인인양 조용히 자리를 지켰던 것 같다. 사라지는 공간에게 사진으로 말을 건다. 안녕. 너는 여전하구나. 바닥이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성묘를 가기 전날, 아버지와 10분 정도 진로 얘길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아버지의 소통법'이었다. 아비는 아들이 못났다고 했고, 아들은 아비가 저를 너무 모른다고 했다. 아들은 아비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애시당초 설득시킬 의지도 없었다. 전 아버지랑 얘기하면 주눅이 들어요. 제가 변명하고 있는 걸로 보이세요? 겨우, 그 정도였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막막하다.

성묘를 갔다온 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친척을 배웅하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아는 애에게 문자를 보냈다 : 개랑산책하러나왔어.바람은부드럽게불고공기는서늘하다.냇가에오리가놀고.좋다.

상쾌했던 오후와는 달리, 밤에는 비가 쏟아졌다. 공기가 부딪히며 서로 깨부수고 비명을 질렀다. 끝내 달은 못 보는 줄 알았다. 밤 12시가 넘었지만 이대로 누울 순 없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비 그친 새벽 공기가 시렸다. 비에 씻긴 달이 무지개빛으로 몸단장했다. 소원을 빌었다. 세 가지. 부디, 이뤄지길. 그리고 구름 속으로 수줍게 숨어드는 걸 조용히 바라보았다. 올해도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추석은 가족 판타지라는 글을 읽었다. 맞는 말이다. 맞는데, 그런 판타지조차 없이 살아갈만큼 난 강하지 않은 것 같다. 강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문득 스무 살의 나에게 말을 걸었다 : 나 말이다. 너보다 마음이 더 가벼워. 그래도 말이다. 난 여전히 네가 부러워. 미안해. 네가 빌었던 소원을 난 이루지 못한 거 같다. 기억도 나지 않아. 그래도 넌 한창 신나게 살겠지. 나 같은 걸 생각지도 않고서. 나도 당분간은 네 생각하지 않을 거야. 안녕. 내일을 모르고 살았던 어제의 나.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leopord.egloos.com/tb/4248506 [도움말]

덧글

  • dcdc 2009/10/05 00:59 # 답글

    이번 추석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 leopord 2009/10/05 01:01 #

    엄청 바쁘셨군요.ㅎㅎ
  • 백면서생 2009/10/05 02:49 # 답글

    그래도 그렇게 갈 곳이 있으시니 부럽습니다. 추석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데 말입니다. 선산에도 가고, 친척들과 매년 하는 같은 이야기도 또 나누고, 어른들과 또한번 반복하고... 과연 '고향'이란 물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가져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습니다.

    '뚜뚜'는 중국어에서 살짝 아기 언어로 '배肚'를 칭하기도 합니다. '아가야 배 고프니?'를 '아가 뚜뚜 고파?" 뭐 이런 느낌으로 쓰기도 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 복수형이 되기도 하고 귀여운 표현이 되기도 하지요. 잘 먹는 강아지 이름으로 제격이네요.

    장지문이 있는 한옥이라니 곧 사라진다는게 안타깝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역시 무엇이든 존재가 흩어지는가봅니다. 사진 잘 보았습니다. 실력도 좋으시네요.
  • leopord 2009/10/05 10:54 #

    그럼에도 좀 부담스럽기도 해요^^; 아무래도 지금 상태가 불안정하기 때문이겠지만 말입니다.

    뚜뚜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코끼리 뒷걸음질 하다 개미 밟은 격이긴 하지만, 나름 어울리네요.ㅎㅎ

    핸드폰 카메라라 화질도 안 좋고, 실력도 그닥 좋지 않아서 그저 풍경에게 미안할 뿐입니다.ㅎ;;
  • Mitena 2009/10/05 04:10 # 답글

    차차뚜뚜빙빙 음... 이런추석은 무효라 주장하고싶지만 잡채는 먹었으므로 용서하겠어. ㅎㅎㅎ
    난 어렸을적부터 할머니댁이 서울아파트라 명절에 마당있는 집(시골)에 내려가보는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 ㅜ.ㅜ 그리고 이야기 들려주는 할머니? 이건 동화속에만 있나? ㅜ.ㅜ
    뭐 이젠 할머니댁에 가지도 않지만;;
  • leopord 2009/10/05 10:55 #

    서울 사는 친구들은 시골에 대한 로망이 조금씩 있는 거 같더라.ㅎ

    우리 할머니는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분은 아니지만, 무뚝뚝하지도 않아서 나름 이런저런 이야길 듣긴 했지ㅋ
  • 국화 2009/10/05 09:15 # 답글

    아아 뚜뚜야 . 이름만큼이나 아주 늠름해요 . 하하 뚜뚜 ...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 저는 너무 많이먹어대서 오늘은 아침점심안먹어도 배가 안고플듯합니다 :) 추석은 가족판타지라는 말, 매우심히공감되요 -
  • leopord 2009/10/05 10:56 #

    역시 추석은 과식의 명절인가 봅니다.ㅎㅎ 맛나게 잘 드셨나요?
  • 소시민 2009/10/05 09:23 # 답글

    크흑 이제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되는군요 ㅠㅠ
  • leopord 2009/10/05 10:56 #

    ㅠㅠ
  • 2009/10/05 15:1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leopord 2009/10/06 00:24 #

    그러게요. 그런데 전 제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 같아요. 그곳은 공기도 좋고 추억도 많지만 절 너무 힘들게 하거든요.ㅎㅎ;

    졸업 후 독립하고 회사 다닌 6년이라... 비밀댓글 님도 참 열심히 사시는 거 같아요. 저도 열심히 할께요. (갑자기 급훈훈한 마무리를 ㅎㅎ;)
덧글 입력 영역